여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신의 눈을 덮던 어둠이 걷히고 나서도 한동안은 어둠 속이었다. 눈을 뜬 여신은 주변을 천천히 돌아본다. 그리고는 잊고 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거대한 왕국. 과거의 잔해. 그리고 다시 생겨나는 마수. 자신의 존재. 그리고 역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들이다. 문득 그녀는 등을 만져보았다. 새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그것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임을 여신은 알았다.
“레아?”
여신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쌍둥이 언니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같이 잠들었어야 하는 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리고 여신은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들과 함께 있어야 할 어떤 물건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레아가 가지고 있나?’
그것이 무엇이냐면 마력의 근원이 되는 물건이다. 여신에게 그것을 지키는 것은 이 세계를 위한 의무였다.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제 분신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여신은 눈을 감았다. 제 언니의 기척을 찾으려 함이다.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직 위협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레아니까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거야.’
여신은 천천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 등에 돋아난 날개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날개의 형태는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이 안에서 어떻게 나가는 지는 기억하고 있다. 여신은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천천히 계단을 걸었다. 어두운 계단의 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면, 곧 여신의 발밑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온다. 여신은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때를 기억했다. 새하얀 아침 아래에 따뜻한 햇살을 맞고, 이 어두운 이스의 중추에서 눈을 감았던 기억. 그 때와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신이 딛고 있는 계단의 바닥은 제법 부식이 되어, 갈라진 틈새들이 많이 보였다.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딛던 여신은, 그 얼마 안 되는 햇빛을 맞으며 자란 것 같은 식물들을 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무성하게도 뻗어 있지만, 여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신은 이윽고 계단의 끝으로 갔다. 계단의 위에는 궁전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녀와 분신이 살던 곳이다. 녹색 빛을 가지고 있던 그 곳은 마침 중천에 오른 태양의 빛을 받으며 있었지만, 이미 그것은 폐허에 가까운 흔적이었다. 여신은 걸었다. 폐허의 끝에 서린 풍경을 보기 위함이다. 원래는 탁 트인 테라스였어야 할 곳은 이미 지지대가 상당히 무너져 있어 제대로 기대 설 수조차 없어보였다. 여신은 개의치 않았다. 이 왕국이 이렇게나 무너져 있다는 것이, 여신이 지키려던 것이 온전하다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여신은 테라스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궁전 아래에 거대한 신전, 그리고 그 아래에 또 커다란 도시 몇 개들. 그리고 에스테리아. 제법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변하지를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여신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동상?”
청동으로 만들어져, 곳곳에 녹이 슨 동상이다. 마치 이 땅을 지켜보기라도 하려는지 그것은 아래 지대를 바라보게 세워져 있었다. 여신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새겨진 글씨를 한 번 만져보았다. 여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그것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스의 비밀을 푼 영웅.
“아돌…….”
여신, ‘피나’는 그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제야, 잠든 시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의 무게를 알았다.
‘그렇구나. 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났구나. 피나는 무거워지는 마음을 잊으려, 눈을 천천히 감았다. 각오는 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눈을 감는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것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눈을 감으면 영원이며, 다시는 깨어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였건만. 영원의 잠을 자려 하였던 자신을 깨운 이는 누구일까. 그리고 왜 레아는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피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미련을 떨쳐내었다.
우선은 알아야 한다. 지금이 무엇인지. 왜 자신은 눈을 떠야 했는지. 레아는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1
피나는 궁전에 나와 신전을 걸었다. 고요한 신전에는 인기척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꽤 오래 세월을 보냈고, 피나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보았을 때만 해도 마물들에게 점령당하여 제대로 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신전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피나는 잠시 그 시절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행복했던, 불행을 모르던 시기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시절이 주는 것은 이제 찬란했던 과거의 흔적뿐이었고, 지금 그것들은 모두 폐허로만 남아 그녀의 발밑에 쌓여 있었다.
머나먼 일이다. 너무도 머나먼. 피나는 한없이 걸었다. 그러다 몇 개의 방을 지나쳤다. 각 신관들의 거처였지. 기둥 하나하나를 손끝에 대면 거기에 서린 추억들이 방울이 져서 그녀에게 들어왔다. 여신은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자신은 미련 속에 갇힌 것일까 생각을 하면, 당장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결론을 내리고 만다. 마치 어제와 같은 일이다. 영원의 잠에 빠졌던 그녀에게는.
날개를 없애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게 되어도 그녀는 여전히 맨발이라, 돌이 밟히는 감각이 발끝에 맴돌았다. 이미 갈라진 틈새가 발가락 끝에 닿게 되면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피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작은 바람이 불었다. 여신의 가는 길을 인도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바람소리가 윙윙 울렸다. 피나는 바닥의 틈새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커다란 문이 보였다. 신전의 대문, 살몬의 끝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다고 생각을 하며, 피나는 대문 앞에 서서 그것을 살살 밀었다. 문은 뻑뻑하여 잘 밀리지 않았다. 피나는 제 손 끝에 살짝 마법의 힘을 더했다. 그러자 삐그덕. 낡은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그녀가 있는 힘껏 밀어,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는 의외로 거대한 마을이 보였다.
“어라, 여긴…….”
피나는 순간적으로 멍한 얼굴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어라, 여기가 이랬던가? 잠시 지나간 세월에 대해 망각한 그녀는 신기한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억을 잃었던 그 때와 같이 낯설면서도 새로운 기분이다. 피나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그녀의 앞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구냐!”
낯선 이를 경계하는 눈빛에 피나는 흠칫 놀라며 제 앞에 선 사람들을 보았다. 피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불안을 보았다.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낯선 존재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애초에 날개도 없었지. 새삼 깨닫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기는…….”
그래서 그녀는 한껏 기억을 잃은 척을 해 보기로 했다. 이미 익숙하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 누군가 또 기억을 잃은 그녀를 구해줄 지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던 피나였지만, 그녀의 기대에 응해줄 만한 사람은 존재치 않을 것은 진작 알고 있다. 그러던 와중 피나는 사람들의 술렁임을 보았다. 그것은 경계와는 또 다른 공기의 흐름이었다.
‘저기, 어떻게 된 거야? 신전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나도 몰라. 저 신전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피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물론 그들의 시선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이처럼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이가 무슨 일이지 물으며 걸어왔다. 노란 머리의 사내는 그들을 헤치고 피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은?”
“모르겠어요.”
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몸짓이나 넘실거리는 시선은 가녀린 소녀 그 자체라, 피나를 둘러싼 이들이 그녀를 의심하거나 할 수는 없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대장 격의 사내는 피나를 한참 쳐다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고민하는 눈치로 말했다.
“장로님을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어렵게 꺼낸 말인 듯 보였다. 그 말에 주변 이들이 당황한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뚫고 사내는 말하였다.
“장로님이 제게 당부한 겁니다. 신전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데리고 오라고.”
사람들은 불만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장로를 들고 나오는 사내의 말에 반박은 하지 못한다. 그를 승낙의 뜻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사내는 피나를 보았다. 따라오시죠. 곧 그 남자의 말을 따라 피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그를 따라 걸었다.
장로의 집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신전 대문에서 계단을 몇 번 내려가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통상 집들과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장로란 단어를 들은 탓인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집이었다. 피나는 살짝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크지 않은 넓이의, 소박한 집 안에 들어선 피나는 거실에 앉은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노인은 흠칫 놀라는 듯 보였다.
“네가 데려온 게냐?”
노인은 피나의 뒤에 있던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내는 그렇다고 했다. 노인은 곧 어디서 데려왔냐고 물었다. 사내는 신전 문을 열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노인의 눈이 커진다.
“맙소사.”
노인은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피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로 그 신전에서 나온 사람인 게지?“
“그럼요.”
노인의 말에 사내는 확신을 갖고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흑진주가 다시 깨어난 건가.”
그리고 노인은 분명하게 피나를 보며 말했다. 피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할아범. 얘기를 해줘. 무슨 소리인데?”
사내가 초조한 듯 노인과 피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은 그에게 대답해 주는 대신 피나를 보고 말했다.
“예까지 오시는 데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
“안심하셔도 됩니다. 라미아의 사람들은 왕국의 전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혹 제가 기억이 나십니까?”
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도 그렇겠군요. 우리가 본 건 아주 잠깐이었고, 나는 나이를 들어버렸으니 말이지요.”
“신관의 후예로군요.”
피나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토=다비입니다. 여신이시여.”
그 이름을 들으니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신관 다비의 후손이었고, 원래는 살몬 신전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던. 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피나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 때와 많이 달라졌군요.”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여신님은 여전하시군요. 그 때와 똑같아요.”
피나는 살짝 웃었다. 그녀에겐 아주 잠깐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 잠깐은 너무 순식간에 거대한 세월이 되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이스 왕국 시절에도 그렇게 많은 주민이 사라지고 또 많은 자손이 생긴다. 하지만 그 때에는 차라리 그 세월을 눈으로 마주할 수라도 있었다. 보지도 못한 세월이 하염없이 지나가 있었음을 깨닫는 건 썩 그리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여신님을 뵈니 마치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습니다. 노인네의 부질없는 추억 팔이에 불과하겠지만…….”
고토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당신은 그 때와 많이 다르지 않아요.”
“그런 것 치고는 못 알아보셨잖습니까.”
“하루 아침 만에 그렇게 변하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피나는 활짝 웃었다. 처음에는 지나온 세월이 절망적이었지만, 곧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를 생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눈을 떠보니 어두컴컴한 감옥.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서 망연하게 앉아 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차라리 아는 사람이 있는 지금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그 막막한 감옥의 문을 열어주었던, 하나의 구원을.
“고토.”
“예.”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고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 편 소파로 피나를 이끌었다. 피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고토는 지금도 멍하니 여신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내를 흘끔 보더니 말했다.
“얘야. 사람들한테 얘기해 줘라.”
“뭐라고 할까요?”
고토는 한 번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아직은 조용하다만……. 대비를 해 두라고. 그리고 내가 들어오라 할 때까지는 바깥 일을 봐다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고토는 밖으로 나가던 사내의 뒤를 쫓더니 그가 문을 나서자 문을 쾅 닫고 걸쇠를 걸었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겠다는 의지로 돌아온 그는 부엌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채워, 불을 피운 뒤 돌아와서는 피나를 보았다.
“자, 그럼 마음껏 물어보세요. 여신이시여.”
2
“그 이후 에스테리아는 상당히 변했지요.”
고토는 피나의 앞에 따뜻한 차를 올려두며 말했다.
“섬 아래쪽 동네는 그 때 처음 가봤지요. 몇백 년이나 떨어져 있었어도 언어가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러며 고토는 차를 한 잔 홀짝 마신다.
“근본이 비슷하단 게 이런 건가 싶더군요. 아, 그 이후 폭풍은 사라졌습니다. 덕분에 다시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섬도 다시 활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왕국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번영을 누리고 있고 말이죠.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 마을도 제법 커졌잖습니까.”
“조금 놀랐습니다.”
이 사람, 이렇게 수다스러웠던가. 피나는 그를 아주 잠깐 만났던 걸 깨닫는다. 하기는 제대로 알 만한 틈도 없기는 했다.
“뭐,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덕분이기는 합니다.”
고토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다.
“폭풍이 사라지게 해준 것만 해도 은혜인데, 그 이후로 준 걸 생각하면 그 크기는 이 바다를 가득 메울지도 모릅니다.”
“그 동상은 그것 때문에 생긴 건가요?”
피나가 물었다. 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오셨습니까? 꽤 잘 만들었지요?”
“신전에도 하나 있더군요.”
“그랬지…….”
아무래도 고토는 그 자리에 있던 걸 잊었던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그건 '아돌'을 기념하는 동상입니다. 아마 나중에 마을을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저기에 있죠. 아돌의 동상을 세우는 것 자체는 꽤 오래 전부터 논의가 됐던 부분이었는데, 20년 전이었던가요? 그의 모험기에 에스테리아의 이야기가 실린 이후로 그 모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던 소위 모험가들의 방문이 잦아졌거든요. 그래서 그가 지나간 곳 중 상징이 깊은 곳에는 모두 그걸 세워둔 겁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신전의 것도 그것입니다. 동상을 신전 안에 두는 건 반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뤄졌죠.”
고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신전의 문이 잘 열리지 않더군요.”
피나가 한 마디 건넨다. 그 말에 고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놀라셨겠군요. 3년 전부터 신전을 폐쇄하고 있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모험기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자체의 훼손이 심해져서 말이죠, 아무래도 우리한테 중요한 건물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모험가들 중 일부가 여신님이 계신 곳까지 가려고 했거든요.”
그 말에 피나는 흠칫 놀란다. 고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지요.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신전을 폐쇄하고, 마을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그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까 나간 제 손자 녀석도 그 일을 하는 사람 중 하나지요.”
고토는 문 쪽을 흘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손자였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과 제법 닮았습니다.”
“말썽쟁이긴 합니다만 말은 잘 듣습니다. 아까 전에 여신님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한 것도 분명 그 녀석이겠지요. 맞습니까?”
“맞아요.”
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에게는 살짝 뻥을 더하긴 했습니다. 신전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그게 특히 푸른 머리의 여성이면 재앙의 전조이니 반드시 내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재앙이요?”
피나는 풋 웃었다. 정말로 정도가 심한 거짓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장난이 좀 심하셨군요.”
“하하. 그래서 그 놈 못 들어오게 한 겁니다. 속은 거 알면 길길이 날뛸게 빤하니까요.”
고토는 껄껄 웃었다.
“아차, 이거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군요. 묻고 싶은 게 있다 하셨지.”
그러다 퍼뜩 깨달은 듯 고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전 안에서 나오는 사람에 대해 신경을 쓰는 모양인데, 혹시 레아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 말에 피나는 지체 없이 물었다. 고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아…. 아, 쌍둥이 여신님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보지 못했습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여신님은 두 분이셨으니.”
“못 보셨다고요? 하지만 살몬 신전의 입구는 하나일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요 근래 수상한 움직임이라고는 여신님뿐이었습니다……. 아.”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고토가 뭔가 생각난 듯 탄식을 냈다.
“며칠 전에, 신전에서 빛이 날아가는 건 보았습니다. 혹 그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빛이요?”
피나가 되묻자 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갔나요?”
“섬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건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 방향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란스 마을 쪽이었지 싶군요.”
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서 다음 목적지는 확실해졌다.
“고마워요. 하나만 더 물어도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고토는 간단히 긍정하였다. 피나는 한 번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것을 묻기에 이상스럽게도 긴장이 된다.
“아돌은 지금, 살아 있나요?”
덧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희망을 담아 피나는 물었다. 20년 전의 모험기. 그리고 지금의 동상.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방향인지 알면서도 그녀는 물은 것이다. 이 사람이 살아 있다. 다른, 그녀가 알고 있는 6신관의 후손들 역시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완전히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는 아닐 것이다. 혹시. 혹시라도. 모르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고토의 대답은 피나의 기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에스테리아에서 들리는 그의 소식은 다른 나라에서 건너오는 아돌의 모험기 정도라서.”
“그런가요.”
“해안 쪽 사람들은 알지도 모릅니다. 라미아는 크지만 소식은 느린 편이니까요.”
고토 노인의 말은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한 말임을 피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조금씩 희망의 파도가 밀려옴을 알았다. 고맙다는 말을 고토에게 전하며, 피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소식을 알 수 없는 제 언니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토는 그런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여신의 존재 자체가 낙관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다른 여신님을 찾으러 가십니까?”
“예.”
피나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보고 가셨으면 좋겠지만 역시 무리겠지요.”
문을 열어주는 고토를 보며, 피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만나서 즐거웠어요. 고토=다비여.”
활짝 열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피나는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일 거라는 게 아쉬울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피나는 그의 옆으로 지나갔다. 제게 인사하는 노인을 뒤로 한 채 피나는 라미아 마을을 사뿐히 걸었다.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깨어난 것 자체가 이 평화가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서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피나는 지금도 알지 못하였다. 왜 자신이 깨어난 것이고, 왜 레아는 자신의 곁에 없는지.
피나가 마을의 끝으로 나가니 무덤의 더미가 보였다. 거기에서 유독 눈에 띄는 두 개의 무덤을 보았다. 글씨는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석 끝에 흐릿하게 팩트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흐릿한 글씨에 비해 명확하다.
아직 살아남은 이도, 이미 사라진 이도 존재하는 세상.
그는 정말로 어떻게 된 것일까. 피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라미아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음 목적지가 란스 마을이라면, 아마 그 장애물들을 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