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감방에 들어앉은 금발의 사내가 가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여기에 들어올 것은 각오하였다. 그러나 정말로 이루어질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세상은 변했다는 뜻이겠지. 결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말이다.
이 안에 들어온 지는 며칠 되었다. 다행히 대접만큼은 융숭하다. 아마도 그를 여기에 가둔 사람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사내, 유시스 알바레아는 제게 주어진 고급 식사를 보고 비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 식사는 마치 그것이다.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의 돼지에게 고급 먹이를 주는 것. 그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내는 식사에 제대로 입을 대지 않았다. 애초에 이 안에 갇힌 다른 이들과 제 식사가 다른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유시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입 모양에 맞추어 입가에 주름이 푹 패였다 사라진다. 그는 멍하니 철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바깥은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에 며칠 더 있다 보면 맛이라도 가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조차도 기우임을 그는 알고 있다.
재판은 이틀 뒤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훤하다. 유시스는 이미 제 목에 칼이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알고 있다. 두려워 할 일은 아니다. 이미 각오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숨 값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이것밖에 없긴 하지만, 이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항상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네가 거기에 있다면, 나는 안심할 수 있어.”
유시스는 어떤 말을 생각했다. 오래 전에 들었던 말이다.
“앞으로 나는 너를 막아설 수도 있고, 네가 나를 막아설 수도 있을 거다. 서로 옳다 생각하는 것을 두고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연하고 옳은 싸움이다. 생각의 차이로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렇겠지.”
“그러나 만약 나나 너. 둘 중 누군가가 ‘틀린’길을 가게 된다면. 그 때엔 서로를 막아서는 벽이 되자.”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아주 당연한 권리이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거다. 그러니 너는 네 갈 길만 가면 된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리운, 지금도 그의 마음에 깊이 박힌 주박의 말이었다. 그 말을 유시스에게 남긴 이는 그의 오래된 친우인 마키아스 레그니츠. 현 에레보니아 제국의 재상이다. 그는 이전에 존재했던 소위 ‘철혈재상’ 길리아스 오스본을 재상의 자리에서 몰아낸 혁명의 시기, 재상 편에서 혁명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내부에서의 공로자다. 그는 철혈재상의 협력자였던 유시스의 형, 루퍼스 알바레아의 수작으로 인하여 제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오스본을 쓰러뜨리기로 결심한 이다. 그를 위해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철혈재상의 개가 되기를 선택하였고, 그 약속은 그 때 유시스와 한 것이었다. 친우로서. 앞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될 적으로서.
그리고 지금 분명히 잘못하고 있는 건 마키아스 쪽이었다.
마키아스의 잘못은, 지금 유시스가 붙잡혀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유시스가 이 안에 들어온 것은 ‘황실의 명령에 불복하여 민생을 교란케 하고 반란을 획책한 죄’ 때문이었다. 그 죄목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크게 터지려는 것을 참는 유시스였다. 교란에 반란 획책이라니. 그는 평생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잡혀온 이유는 당연히 다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유시스는 본보기였다. 신분제 페지를 거부한 이의 결말을 보여주기 위한 제물이다. 물론 괜히 붙잡힌 것은 아니다. 제국의 귀족 중 4대 명문에 들어가는 이 중 하나이며 현 귀족회의 수장인 그가 신분제 폐지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유시스 개인은 신분제가 사라진다고 해도 크게 타격을 입고 괴로워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흐름이라면 결국 적응하게 되어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귀족이란 것이 가진 허황됨을 모르는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신분제 폐지가 단순한 시대의 흐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면, 공화국에 본보기를 보여줄 생각이다.’
얼마 전 드라이켈스 광장에서 이루어진 공개 연설에서 마키아스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여차하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다르게 말하면 전쟁을 할 생각이라는. 제국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인 것이, 에레보니아 제국의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길리아스 오스본을 그 자리에서 끌어낼 때의 명분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것 역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복하고자 함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굴레를.
당연히 유시스 및 귀족회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평민파 중 일부 역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 쯤 되면 하지 않아야 맞는 것이건만 마키아스는 그를 기다리기라도 했듯 다음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문제의 '신분제 폐지'였다. 물론 신분의 구별이 점점 의미를 상실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살고 있었다. 그 사실만큼은 인정하나, 이것은 굉장히 인위적인 생각이다. 왜냐면 이 신분제 폐지로 마키아스가 얻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귀족이 사라지면 귀족의 군대인 영방군 자체가 그의 손에 들어가며, 여차하면 하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잉여 인력들을 군으로 차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흐름이다. 평민회 다수의 동의를 얻어, 이미 힘을 잃은 귀족회를 두고서 진행된 그 건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일이 그것이었다. 대놓고 눈에 보이는 행태이다. 그렇기에 유시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서로를 막는 벽이 되자.’
그렇다. 그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비단 약속의 문제가 아니다. 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신분제 폐지령을 내릴 때, 영방군의 해체만을 받아들이겠다거나, 나름대로 귀족회가 할 수 있을 제안들을 내놓았으나 이미 여러 가지 견제책으로 힘이 약해진 귀족회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 다음으로 호소해야 할 일은 전쟁이었다. 이것이 전쟁을 위한 밑거름임을 모르는 이 없었으니, 그를 이용하여 저지하려 했다. 신분제 폐지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전쟁만은 안 된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 약속할 수 있겠나? 재상과 단 둘이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일어날 리 없는 전쟁으로 민중의 마음을 불안케 하였다. 그가 시민들을 ‘교란’시킨 죄목이 그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대로라면!
유시스는 마키아스를 모르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는 지독한 고집쟁이였다. 처음 만났던 1년간의 짧은 학창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그러했다. 결심하기까지 시간은 좀 필요한 편이지만 한 번 결심하면 바꾸는 일은 절대로 없다. 공개 연설에서의 선언 역시 그것을 의미한다. 그가 목표를 입 밖으로 낸다는 건 그것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것과 같다. 거기다 이미 그를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시스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제 힘은 그를 막기엔 부족해져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힘도. 친우로서의 힘도. 그런 덕에 유시스는 그저 자신에게 내려오는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감옥 바깥에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유시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그 다음에 들렸다. 유시스는 눈을 찌푸렸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모든 문제의 원흉이 서 있었다.
“네 대접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는데, 어때?”
“너무 융숭해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더군.”
유시스는 핏 웃었다. 바깥의 사내는 은색 프레임의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럴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뭐하러 왔나?”
유시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상대, 마키아스의 얼굴은 미소가 걸린 채이다. 그것이 더 유시스를 불쾌하게 했다. 유시스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마키아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갖게 된,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포커 페이스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이제 제 친우에게조차 본심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인가. 너는. 유시스는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보러 왔어. 너를.”
“이제 와서?”
“유시스. 부탁이다. 마음을 돌리면 안 되는 거냐. 너만 내 뜻에 따라준다면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
바라는 게 없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유시스는 실소를 터뜨린다.
“바라는 게 없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나.”
“…….”
“내 쪽에서 물어도 되겠지. 네가 바라는 게 뭐냐? 나를 여기에 두면서까지 네가 하려는 것 말이다.”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다.”
“허튼 전쟁이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유시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마키아스의 표정이 굳었다.
“허튼 전쟁이라니. 힘을 보이는 일은 필요한 거다.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상대에게는 특히 말이지.”
“공화국의 힘이 약했다면 그렇게 굴지도 않았겠지. 비슷한 힘을 가졌기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사건이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한 번 눌러야 하는 거다.”
“비슷한 힘이 부딪혀봐야 소모전에 불과하다. 그럼 피해를 입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너도 이미 봤지 않나!”
유시스가 일갈한다. 마키아스의 표정은 미묘하다. 화를 내는 듯, 그러나 체념한 듯. 뭘 말하고 싶은 지 알 수가 없는 얼굴이다. 유시스는 표정을 구긴 채이다. 제 속을 드러내는 데에 거침이 없었던 친우는 이제 이토록이나 제 얼굴을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유시스는 볼 수 있었다. 그 잠깐에 담긴 수많은 상념을. 그것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유시스.”
마키아스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나는 말이야. 그 날 이후로 깨달은 게 있다.”
어느새 주름이 푹 패인 친우의 얼굴에는 근심이 들어 있다.
“힘은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 갖고만 있으면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만, 그들이 내 힘을 노리지 않는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다.”
“레그니츠.”
몇 마디 더 쏘아붙이려던 유시스였으나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 말로 그는 알았던 것이다. 더 이상의 설득이나, 더 이상의 반대도 이제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러나 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한 열차는 어딘가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멈추지 못한다. 유시스는 깨달았다. 벽 정도로는 이제 그를 멈출 수 없음을.
“그건 바깥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니 마음껏 활개를 치는 거다.”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자는 거냐. 죄 없고 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해서?”
“약한 이들은 싸우지 않아. 싸우는 건 민중이 아니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 해도,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게 누군지 모르지 않을 텐데?”
벽으로는 안 된다. 뿌리가 단단한, 바위가 되어야 한다. 유시스는 더욱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바위가 될 수 없었다. 정녕 너를 막을 수 없음인가.
“레그니츠. 다시 생각해라. 일전에도 말했듯 난 신분제 폐지를 막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네가 원하는 게 전쟁인 이상 나는 계속 너를 막을 거다.”
“유시스.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전쟁을 그만 두면 네가 원하는 건 이루어진다.”
“그것만은 안 돼.”
“그렇다면 그 뿐이다. 나를 전범으로 만들지 마라.”
전범이라는 단어에 마키아스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본심이다.
“이기면 되는 거다! 우리는 부족하지 않아!”
“그 말을 ‘오스본’이 똑같이 한 건 기억하나?”
마키아스가 입술을 씹었다.
“알고 있나? 지금의 너는 네가 그리도 미워하던 오스본과 전혀 다르지 않다. 역시 스승이라는 건 중요하군. 기회를 노리며 납작 엎드린 줄만 알았더니 개의 버릇까지 배워왔을 줄은.”
“유시스!”
“레그니츠. 어설프게 날 설득하려 하지 마라. 어차피 너는 나를 죽이러 온 거 아니냐. 슬슬 본색을 드러내도 된다.”
유시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 마키아스가 킥킥 웃는다. 유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쉰 소리로 킥킥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확실히 유시스가 알던 것은 아니었다.
“하긴, 네가 내 말을 들을 인간이었다면 여기에 있진 않았겠지. 그러나 유시스. 알고 있겠지만 이제 전쟁은 네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안다.”
“따라와 주지 그랬나. 너는 계속 나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바라는 거였다. 나는 지금도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유시스는 지친 웃음을 지었다.
“레그니츠.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나?”
“약속?”
마키아스가 되물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유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면 됐다. 어쨌든 나는 네가 내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단 한 번도 두려운 적이 없었다.”
“너란 놈은 도대체가. 왜 죽음을 자꾸 재촉하는 거야! 반대하지 않으면 돼. 딱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되는 일 아닌가!”
이 또한 본심이다. 그러나 그 본심이 가리키는 마음이 너무도 추악하다는 생각이 들어, 유시스는 크게 실소를 자아내고 만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한 번이라도 네 예전을 생각하지 못하는 거냐. 내게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죽이려 했다면 망설이지 마라.”
“유시스!”
“얘기는 끝났다. 재상 각하를 모시고 가라.”
유시스는 바깥에 있는 간수에게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그 뒤로 마키아스가 휙 돌아서자 그를 따라 걸어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유시스는 눈을 감았다. 문득 생각이 든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설득. 아마 여기에 찾아온 것은 재상으로서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남은, 철혈재상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마지막 흔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인들 무엇하는가. 너는 결국 그것을 버리지 못할 것인데.
그 후 이틀은 순식간에 지났고, 그의 재판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변명할 틈도 무엇도 주어지지 않은 채, 반란을 획책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너무도 당연한 흐름이다. 유시스는 시종일관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한 얼굴로, 알바레아 공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마치 남의 일인 양 들으며 서 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생각했다. 참으로 의연한 모습이라고. 죽음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제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유시스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형 집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드라이켈스 광장. 오스본을 죽인 바로 그 자리에 유시스는 서 있었다. 그가 억울한 이유로 서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있는 유시스를 구해줄 수는 없었다. 물론 유시스 역시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각오한 것이다. 거대한 잘못을 막는 벽이 되려 하였으나 벽이 되지 못한 사내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마키아스의 모습도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 2의 철혈재상은 유시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표정은 멀리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시스의 죽음을 계속 담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유시스는 웃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한 걸음씩 걸어간다.
단두대의 앞에 선 유시스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너무도 초연한 얼굴로 그는 대에 목을 가져다 댄다. 곧 위에서 거대한 칼날이 떨어지고, 제 목도 같이 굴러갈 것이다. 그 결말은 어떻게 끝날까. 유시스는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유시스의 시선은 시종일관 그를 향해 있었다.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를.
‘그래. 똑똑히 보아라. 레그니츠. 내가 죽는 것을.’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기 직전까지도 유시스는 그의 죽음 자체가 저 너머의 재상을 바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 기대는 진즉 버렸다. 하지만 유시스가 초연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폭주하는 열차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건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나 산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박은 것은 가장 아래의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죽음은 더없이 부당한 일이며, 그가 하려는 것은 결단코 제국의 안녕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이 죽음을 볼 이는 재상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제국의 사람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제국의 사람들. 그들의 눈이 거대한 잘못을 담을 것이다. 그것이 잘못임을 알게 되면 그들이 제일 먼저 탈선한 기차를 막으려 들 것이다.
그것이면 이 목숨의 가치는 충분하다.
툭. 생명이 칼날 아래 끊어진다. 금발의 사내의 목이 처형장 위를 구른다. 끔찍한 광경에 눈을 돌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재상, 마키아스 레그니츠만큼은 그 목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더없이 평온해 보이는, 그래서 역으로 불안한 그 얼굴에서 마키아스는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2
유시스 알바레아를 죽인 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전보다는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알바레아 공’의 목을 베어버린 재상 앞에 맞설 만한 이들은 더 이상 존재치 않았다. 신분제의 폐지령은 빠르게 전 제국에 퍼졌고, 이윽고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영방군은 모두 정규군에 편입되어, 재상은 순식간에 거대한 군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전쟁에 임할 준비를 하였지만, 당연히도 반대가 거세었다. 그들 하나하나를 벌하려 했던 마키아스였으나, 끝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알바레아 공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불러일으킨 전쟁 반대의 물결은 이윽고 마키아스의 목을 조를 수준까지 오르고 말았다.
그 때, ‘제국의 영웅’은 다시 등장하였다. 거대한 기신이 헤임달 위에 나타난 바로 그 날, 제국민들은 환호하였다.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의 불꽃을 의미하였다. 거대한 잘못을 범한 이를 벌하고자 하는. 그것을 본 날, 마키아스 레그니츠 재상이 광소(狂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나, 그것이 진실일지 어떨지는 모른다.
회색 기신의 인도 하에 혁명을 이루고자 한 이들은 빠르게 황궁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궁 안에 있는 재상, 마키아스 레그니츠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한 때는 그들과 함께 오스본을 체포하였던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손에 체포당하는 사태가 되었다. 재상 집무실에 묶인 채 감금당한 그는 처분을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 새삼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왜 예전을 돌아보지 못하냐고 물었던, 아주 그리운 친우의 말이 떠오른다.
‘알고 있나? 지금의 너는 네가 그리도 미워하던 오스본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철혈에 대한 복수로 불타던 자신이, 어느새 그의 거죽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전에 자신이 철혈을 죽일 때와 똑같았다. 주변에 선 사람들은 모두 경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죽어달라는 얼굴들이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마키아스는 가장 앞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너무도 그리운 이들이다. 린. 엘리엇. 가이우스. 알리사. 엠마. 피. 라우라. 아. 어느새 우리는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가? 그 사람은 예전에 죽었고, 그 녀석도 수명이 다 해 죽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 거기에 있었군. 마키아스는 보일 리 없는 사람을 보았다.
“유감이야. 마키아스.”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었어. 평화 속에서 듣는 음악이 제일이니까.”
“그대의 행위는 너무도 무도한 것이었다.”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싶었어요.”
“또, 사람들이 다치게 돼.”
“바람의 방향이 틀리다. 그 길이 아니었어.”
각자 한 마디씩을 더한다. 알고 있다. 마키아스는 웃었다. 모를 리 없다.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폭주하는 열차처럼 멈출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무엇도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그 때 모두 끝이 났다. 유시스의 처형. 그것이 마키아스라는 열차의 브레이크를 부숴버렸다. 그 결과 삐걱대던 열차는 결국 충돌. 그것이 이 모양이다.
“마키아스. 일전에 네가 내 아버지를 죽일 때.”
가장 한 가운데에 있던, 빛나는 제국의 영웅이 말하였다.
“그 때 나한테 했던 말이 있어. 기억 나?”
“…….”
“반드시, 아버지를 뛰어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어.”
“그랬다.”
“그 결과가 이거야?”
린의 추궁에 마키아스는 웃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쇳소리처럼 새어나오는 웃음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을 믿었던가. 린.”
“믿었어. 네가 한 말이었으니까.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의 무엇을 보고 그리 확신을 했나.”
“내가 알던 너는 멍청할 정도로 성실한 녀석이었으니까.”
“몰랐던 모양이군. 그 때의 나는 이미 죽었다.”
“아니야. 아직 살아 있었어.”
“죽었다. 그 날 전부. 철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던 그 날부터 이미 나라는 인간은 끝장이 났다. 그 이후의 나는 그저 권력의 힘에 굴복한 일개 하수인에 불과했다.”
“마키아스. 아무리 그래도 왜 네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해.”
“린. 동정이란 건 그렇게 간단히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다. 지금 나를 봐라. 내가 무엇으로 보이나. 권력의 맛을 본 괴물. 제국의 질병이자 암운 그 자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런 나라는 괴물을 제거하려 너희들이 오랜만에 다시 모인 것이고.”
“…….”
“그러니 어서 나를 죽여라.”
“마키아스!”
“마수를 물리치는 것과 똑같이 하면 된다.”
“나는…….”
“너는 그러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다.”
“돌이킬 수 있어! 이제라도 마음을 고치고 다시 시작하면…….”
“너답지 않다. 왜 망설이나. 제국을 망친 암운이다. 베어내는 데에 일말의 망설임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제국의 영웅이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거라고!”
“너도, 오스본도. 항상 중요한 일은 나에게 모두 떠맡기는구나.”
“안심해라. 나는 오스본처럼 네 이름만 이용하거나 하지는 않아.”
“이런 데에선 끝까지 성실하네.”
린은 제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궁의 거대한 샹들리에 빛에 반사된 칼날이 매섭게 빛났다. 그 칼날은 그대로 마키아스의 몸을 꿰뚫었다. 과연 달인이다.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피를 토하는 마키아스는 웃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철혈의 개가 된 이후로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마키아스는 입 안에 몰린 피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알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고맙다. 린. 어려운 결정을 해 줘서.”
곧 피로 목구멍이 막히고 말 것이다. 그 전에 말을 전할 수 있어, 마키아스는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과연 린이다. 깔끔하게 치명상을 입혀 놓았다. 시야가 흐릿하였다. 곧 밀려올 죽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마키아스의 몸이 점차 기울고 있었다.
쓰러지는 마키아스의 너머에, 금발의 사내가 보였다. VII반의 동료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키아스는 손을 뻗으려 하였다. 그러나 당연히도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손가락 끝조차 그에게 닿지 못하였다.
“유시스. 거기에 있었나.”
목소리의 형태조차 되지 못한 말이 피로 막히는 목구멍 사이로 새어나갔다. 핏발 서린 마키아스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한 때 제 2의 철혈재상이라 불렸던 이의 몸뚱이가 고꾸라졌다.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그것은 피에 젖은 채로 하나의 시체가 되었다.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승리의 함성이 울리는 발프레임 궁의 창살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린은 거대한 창을 보았다. 여명이었다. 지독히도 어둡던 밤이 끝나고 있었다. 린은 피를 흘리고 있는 마키아스의 시체에서 시선을 돌렸다. 붉은 아침이 찾아왔다. 눈부신 태양이었다. 제 칼에 묻은 피도 태양빛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키아스. 이제 아침이야. 그러니 잘 자.
린 슈바르처는 눈을 감았다. 또 누군가의 죽음을 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 냉혹하지만 찬란한 현실을 깨달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