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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마키] Fade Out 본문

S.Kiseki

[유시마키] Fade Out

Talsoo 2019. 9. 18. 22:01

<백일몽>의 프리퀄입니다. 

아래 이야기를 보고 오시면 더욱 이해가 빠릅니다.

 

https://kasagg.tistory.com/28

 

[유시마키] 白日夢

(표지파일이 없네요....) 2014.11.23일... 아마 케스였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 때 판매했던 유시마키 책입니다. 섬의 궤적 1, 섬의 궤적 2의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대파티입니다. 섬3 시작한 기..

kasagg.tistory.com

이 책을 언제 냈더라.. 아마 2015년 1월 케스였던 것 같습니다.

<백일몽>에서의 마키아스가 어떻게 그런 결말을 맞이하였는지가 주 내용입니다.

 

이것도 역시 발매한 지 오래되어 무료공개합니다.

구매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더보기

 

************************************************

 

에레보니아 제국은 또 한 번의 암흑기를 보내었다. 내전의 슬픔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시작되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던 수 어년간의 군사 정부. 크로스벨의 합병을 시작으로 이루어졌던 그 짧고도 기나긴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은 하나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강요당해야 했다. 사상부터 시작하여 생활까지 모든 것을.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타국을 위협하던 군부 앞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무용이 될 것 같았다. 제국민들은 그저 그것이 당연한 것인 마냥 살 수밖에 없었다. 살고 싶다는 욕망은 어떠한 부조리도 감내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러나 제국을 압박하는 군정 하에서도 그에 반하는 불꽃은 조금씩 타오르고 있었다. 군부에 저항하는 이들은 레지스탕스라는 형태로 각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물론 세력이 작았던 이들은 곧 정부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하지만 그 수라장 속에서도 살아남는 이들은 있었다. 그런 이들이 또 모였다. 그리고 또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그것을 반복하니 결국 그들은 정부에 반()하는 세력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군화에 짓밟힌 제국을 구하자! 라는 슬로건을 걸고 일어난 이들은 세력 확장과 동시에 각지 선전을 통해 군부에 반하는 민심을 일으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활동이었다. 군부가 두려워 입을 다무는 것이 부지기수에, 심지어 정부에게 그들의 은신처를 고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회가 온다고 하던가. 이윽고 그들을 후원해주는 이들과 손을 잡고자 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또 커졌다. 어느 새 그들은 푸른 불꽃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푸른 혁명의 불꽃은 크게 일렁였다. 그 뜨거운 불꽃의 온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군부가 두려워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하나가 되려 하였던 제국은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잡초에 불과하였던 불꽃은 어느 새 군화로만으로 짓밟기엔 너무나도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윽고 푸른 불꽃은 귀족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군부에 불만이 많던 이들은 그들에게 협력하였다. 그를 바탕으로 푸른 불꽃은 영방군이라는 힘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다.

 

시민의 힘을 업은 혁명군은 동부에서부터 일어나, 제국 전역에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봉기 세력을 규합하여 제국의 수도인 헤임달을 포위하였다. 정부군의 저항은 거세었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정부군의 일부가 혁명군에 융합이 된 형태였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전황을 뒤집은 것은 거대한 회색 기신의 등장이었다. 그 모습이 드러난 순간, 모두는 전의를 잃었다. 전설적인 제국의 영웅은 아직도 그 그림자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제국민을 휘두르기에는 충분한 존재였다.

 

이윽고 헤임달은 함락되었고 군 정부 청사는 붕괴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전언으로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최종적으로 시민들이 승리하였음이 공표되었던 그 날. 제국은 진실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군정을 실시했던 이들이 기어코 만들지 못하였던 것이 그 곳에 있었다.

 

군부에 관련된 이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을 선고받았다. 그 중에 군부의 핵심이었던 철혈재상길리아스 오스본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군부의 핵심 인물들이 처형되고 그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때 제국민들은 환호하였다. 살아있을 당시 그의 연설에 환호하였듯. 하지만 그가 죽는다고 하여 끝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군부 휘하에 있던 체제가 무너졌으니 체제를 다시 정립해야 함은 물론이요, 혼란 속에 엉망이 된 타국과의 외교적인 문제도 해결을 해야 했다. 그 상황 속에서 인력은 부족하여 내부 혼란을 진정시키기에도 아직 요원하였으니, 제국의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 모든 사람의 초점은 하나였다. 황제는 이 상황을 진척시킬 이를 누구로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황제는 선택하였다.

 

, 세드릭 라이제 아르노르는 여기 마키아스 레그니츠를 새 정부를 이끌 재상으로 임명하겠다.”

 

그것이 공표되자마자 온 신문이나 사람들이나 모두 그 이야기로 떠들썩하였다. 그 수군거림이 비단 그가 재상감이 아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혁명 세력 푸른 불꽃에 있어 그는 핵심이었다. 불꽃이 끝내 꺼지지 않고 끝까지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귀족과 손을 잡아 세력을 키우고자 한 것도, 혁명 당시 회색 기신을 끌어들인 것 또한 그였다. 그러니 그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누구인들 그가 그 자리를 맡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민 출신인 이가 재상이 되는 것은 아직 신분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다못해 그 길리아스 오스본조차도 재상으로 임명되면서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마키아스는 그 작위마저 극구 사양하였다. 그것이 논란에 더더욱 불을 피웠다.

 

군정 하에도 신분이라는 것은 명목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군부의 탄압 때문에 귀족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의식적인 부분에서 귀족은 평민의 위라는 생각은 아직 제국민들 중 어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루어진 파격적이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평민이 떡하니 앉을 수 있다니. 혁명군에 협력하였던 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특히나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군부 체제 이전에 있었던 평민 중심의 세력, 혁신파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고위 자리에 앉게 되면 펼쳐질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먼저 귀족들에게 손을 뻗었다 한들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이지 결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아마 그들의 반발은 마키아스가 재상이 됨으로서 펼쳐질 자신들에 대한 위협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 세드릭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마키아스가 작위를 받지 않았음에도 그의 재상 역임을 취하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제국 최초의 '평민 재상'이 되었다. 그가 재상직에 역임되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평민들, 특히 오스트 지구의 사람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왔음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으랴.

 

재상이 되자마자 마키아스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하였던 것은 군정 하에 이루어졌던 세수의 정비였다. 군비의 충당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높던 수확 대비 세율을 줄이고 가지고 있는 이들, 특히 귀족들의 정부 공납 비율을 높였다.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방향이었기에 당연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반발을 마키아스는 일축하였다. 군부의 수취보단 낫지 않느냐. 그 말에 틀림은 없었다. 정부에 대한 공납 비율이 높아진 대신, 산발적으로 걷던 다른 세금의 비중은 몹시 줄어들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덜 걷어가는 것이었기에. 결국 귀족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무사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벌어지는 급진적인 정책들에 있어 귀족들의 이익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처음에는 넘어갔던 귀족들도 결국 마키아스의 정책에 크게 반발하였다. 반발하던 이들의 행동력은 빨랐다. 신 귀족파라는 이름 아래에 집결한 이들은, 마키아스가 벌이는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고 나니 자동적으로 마키아스의 정책에 찬동하는 이들 역시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 혁신파라는 이름으로 칭하였다.

하나가 되는 듯 보였던 제국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또 나뉠 것이다. 수많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

 

혁명이 종식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정국은 레그니츠 재상의 손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이 되고 있었다. 그가 그 동안 이룩해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를 혁파하는 것이라 나름 뿌리를 흔드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정도로 빠른 수습이었다. 물론 그 체제 하에 지내왔던 사람들의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제도의 혁파가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 더 살기 좋은 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레그니츠 재상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나 제국의 대부분을 이루는 평민들에게. 그런 와중이니 반대파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의 반대파인 귀족들은 사사건건 그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더군다나 레그니츠 재상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비단 귀족 뿐만은 아니었다. 그 반대하는 이들 역시 각자의 움직임을 보였다. 레그니츠 재상은 그들이 야기하는 분란에 대해 강경한 태도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겉으로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사태의 지속이었지만, 나름대로 제국은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최근 들어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제국 정보국에서 들어온 보고는 처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예의 그 '회귀파'의 세력인가.”

 

보고를 듣던 청록색 머리의 재상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거대한 화면 너머 하위 공무원으로 보이는 상대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최근 어느 루트를 통하여 라인폴트의 하위 모델 무기들이 대량으로 유출되었는데, 그 유출된 무기들을 추적해보니…….”

그 곳이 나왔다는 거지.”

. 회귀파의 본거지.”

 

그런가. 재상은 그 말 대신 다른 것을 더하지는 않았다.

 

추가적인 조사는 하지 않으십니까?”

 

상대의 말이 들렸다.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한 상대는 뒤이어 몇 가지 상투적인 보고를 마쳤다. 수고했네. 재상이 한 마디를 더하자 정보국에서 송신해온 영상은 사라졌다. 곧 침묵이 찾아온 집무실에서 재상,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보지 않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키아스는 사실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몹시 불안한 상황이었다. 소위 회귀파라 불리는 이들은 최근 들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마키아스의 반대파였다. 아니, 반대파라고 하기에는 실상 아직 그들은 형태로서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사실 반대파라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에게 반대파는 많았다. 이를 테면 정국의 혼란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그가 펼치는 대부분의 정책을 반대하는 귀족파라던지. 허나 아직 형태로서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회귀파'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며 마키아스가 경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철혈의 시대, 그들이 주장하는 말을 빌리자면 찬란한 과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귀족들보다도 격렬하게 평민이 억압당하길 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독재하여 그들의 명령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따르는 그 지독하고 끔찍한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군부를 뒤집고 올라온 마키아스는 당연히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줄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며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기에. 하지만 그들이 형태를 가지고 움직이려 하였다. 그것에 대한 경계는 해둘 필요가 있었다. 마키아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것이라도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설사 정념에 불과할 지라도 강력한 폭풍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라이켈스 광장에서의 총성.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이미 20년도 넘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으나 아직 그는 그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마 그것을 겪은 모든 이들은 마찬가지일 테다. 총성은 한 번이었다. 그리고 그 탄환에 오스본 재상이 쓰러짐과 동시에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은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더불어 다시 살아 돌아온 재상과 함께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어찌 되었던가? 내전을 계기로 그에게 저항하는 귀족파의 사람들을 거의 숙청하는 데에 성공한 오스본 재상은 조금씩, 그리고 철저하게 제국을 군부의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군부의 형태가 명확해진 이후로 제국민들은 군부의 억압 아래 자유와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로 살아가야 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가 쳤던 발버둥을 떠올리니 마키아스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였다.

 

그 때 마키아스는 그들의 목적을 깨달았다. ‘총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자신과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줄 그 한 발의 총성을 원하였다. 멍청하긴. 마키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한 발을 위해 오스본이 어떻게 해왔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다. 그렇기에 멍청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것이겠지. 의도를 알아차린 이상 마음만 먹는다면 진압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행동으로 보이려 든다면 어느 정도 진압할 명분도 생기니까. 하지만 역시 대량으로 유출된 무기는 신경이 쓰인다. 수가 틀리면 곧바로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겠는가. 가장 최소한의 희생으로 그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면.

 

정보국에 통신을.”

 

마키아스는 곁에 있던 이에게 말했다. 곧 화면이 켜졌다. 통신을 받은 이는 붉은 머리의 남성이었다. 남자는 마키아스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무슨 일이야? 레그니츠 나리.”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지만, 마키아스는 그에 특별히 사족을 더하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살짝 눈웃음쳤다. 마치 저에게 연락을 할 것을 안 것 같은 분위기이다. 마키아스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로 그에게 말하였다.

 

아까 온 보고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흐음. 역시.”

 

붉은 머리의 남자, 제국 정보부 특무장관 렉터 아란도르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어떻게 할 거야? 증거를 잡으려면 거기를 칠 수 있을 정도로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렉터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거길 바로 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마키아스가 대답하자 렉터는 씨익 웃는다.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어.”

아는 걸 왜 묻는 거야.”

그 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렉터는 그러다가 표정을 조금 고쳤다. 아까보다는 조금 덜 생글대는 낯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예정대로 연설은 진행할 생각이다.”

 

그 말에 렉터의 얼굴이 조금 더 굳었다.

 

위험할 텐데.”

 

그가 그렇게 말할 법도 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연설은 며칠 뒤에 헤임달의 드라이켈스 광장에서 예정된 마키아스의 대국민 연설이었다. 사실 이 연설은 정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제법 말이 많았다. 1030일 정오 드라이켈스 광장. 시간과 장소 모두가 그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제였다. 기분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직도 대부분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스는 그 의견 또한 일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해야 하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줄 수 있으니까. 그러면 모두들 곧 그걸 잊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였다. 반대파인 귀족파의 수장조차도.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 트라우마가 바로 회귀파가 움직이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마키아스는 렉터를 보았다. 걱정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신경은 써주는 것이려니 마키아스는 생각했다. 애초에 명실공히 오스본 재상의 오른팔 격이었던 그를 계속 정보국 특무국장으로 일하게 한 것도 마키아스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죽었어야 할 저를 살려준 이에 대해서 막연하게라도 무언가 생각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말에서 어느 정도는 드러난 것도 같다.

 

알고 있어. 위험한 건.”

미리 진압하는 쪽이 그 연설의 의미를 알리는 데에 더 좋을 지도 몰라.”

 

렉터는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제시안 중 첫 번째였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드러내지 않을 거야. 나라면 그렇게 할 거다. 더군다나 그걸 위해서면 더더욱 지금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아.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서야 곤란하니까.”

정말이지 까다롭다니까.”

 

렉터는 졌다는 듯 핏 웃는다.

 

그러다간 언젠가 탈난다고 전에도 말했잖아?”

탈이 나는 것도 내 관리의 미숙이라고도 말했지.”

 

마키아스는 여유롭게 웃었다.

 

네가 해줘야 할 게 있어. 렉터 아란도르.”

 

그러다가 마키아스는 말하였다. 렉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해봐. 나리.”

분명 네가 알려준 정보나 무기 유출 정도를 생각하면, 연설 날 그들이 움직일 확률은 거의 80% 정도라 보면 되겠지.”

그래. 맞아. 분명 움직일 거다.”

그 날. 일망타진이다.”

 

렉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담긴 수많은 뜻을 그는 바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맡겨 줘. 나리.”

 

그와 동시에 통신은 끊어졌다. 다시 집무실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마키아스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놓인 창문을 향해 걸었다. 발프레임 궁, 재상 집무실의 창문 너머에는 진홍의 제도, 헤임달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과 조밀하게 모인 건물들. 재상의 집무실이라는 것에 맞게 전망도 꽤 쓸 만한 편이다. 생각이 깊어질 때에는 이런 식으로 마키아스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노라 생각을 하면 절로 안심이 되면서 다음을 바라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자리까지 서기까지 너무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혁명을 위해 썼던 것도 같다. 오늘 살더라도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삶을 지내오다가 이 순간까지 와버렸다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징한 목숨이었다. 정부군에 의해 죽을 위기도 여러 번 맞았던 것도 같다. 지금도 그의 마른 몸에는 그 때의 흔적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 있었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하나하나 지나오면서 이곳까지 올라왔다. 그랬기에 마키아스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 군부가 지니고 있던 끔찍한 순간들을 외면하고서 그저 지금 살아가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안일하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큰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날이 바로 승부처였다. 그들을 붙잡아 본보기로 보여줄 것이다. 이 땅에서 군부가 설 일은 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군부는 존재치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키아스는 모든 것을 걸 자신이 있었다. 설사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제 목숨일지라도.

 

 

 

 

 

****

 

그 이후로 마키아스는 렉터에게 회귀파의 동향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드라이켈스 광장 연설까지는 앞으로 3. 아직까지는 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폭풍 전야. 그 날이든, 그 전날이든 분명 그들은 움직일 것이라 마키아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좋은 기회이다. 일을 칠 생각이라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각하.”

 

그런 생각을 하며 일을 처리하는 와중이었다. 바깥에서 근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분입니까?”

알바레아 경입니다.”

 

알바레아 경이라는 말에 마키아스는 쓴웃음을 짓는다. 알바레아 경이라 함은 동부 크로이첸 주를 다스리는 제국 ‘4대명문중 한 축인 알바레아 백작이라. 그는 소위 말하는 귀족파의 대표 격인 존재였다. 마키아스는 들여보내라는 말을 전하고는 잠시 고개를 숙여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들어오면 무슨 말부터 하려나. 그 짧은 시간동안 마키아스는 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레그니츠 재상.”

 

방문객의 굽 소리가 제법 묵직하게 들린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들어 낯익은 방문객의 모습을 보았다. 마키아스와 비슷한 연배일 금색 단발의 남자가 마키아스가 앉은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즘 자주 오시는 것 같습니다. 알바레아 경.”

 

그렇게 말하며 마키아스는 묘하게 불쾌한 빛을 더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 알바레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전부 비칠 것만 같은 푸른 눈을 마키아스의 시선에 그대로 향할 뿐이었다.

 

공에게 전할 말이 많으니, 수가 없지 않겠소.”

 

알바레아 경은 씁쓸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무엇입니까?”

 

마키아스는 물었다.

 

한 두 가지가 아니오. 우선 작은 것부터 말하지.”

말씀하십시오.”

내년에 영지 귀족에게 추가로 붙는 세금에 대해 우리들에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하오.”

 

그의 말에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것부터 들고 나오셨나. 그 생각을 하면서도 마키아스는 의문이 들었다. 이 증세에 대한 안건은 요즘 귀족파의 반대를 사는 안건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작은 것이라 표현하였다. 그럼 그 다음에 또 뭔가 있다는 것인가?

 

법안 발의를 할 때, 충분히 설명을 하였다 생각합니다만.”

나를 포함한 영지의 귀족들은 이것을 적용하기엔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소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바레아 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2년간 제국은 계속 흉작이었소. 그로 인하여 영지의 주민들에게 세수가 제대로 걷히지를 않았지.”

“‘일부사람들은 제대로 걷은 듯 합니다만.”

그 자들이 예외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소이까? 허나 대체로 그렇지가 못한 상황 속에서의 증세는 영지를 지키는 의무를 가진 우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알바레아 경은 금빛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겼다.

 

공이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니, 재고해 주시오. 우리는 그 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소.”

세율을 줄이면 어떻겠습니까.”

 

미간을 짚으며 마키아스는 말했다.

 

어렵소. 나는 납득할 지라도 다른 이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오.”

납득하지 못할 분들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하이암스 가. 서부 지역 사람들.”

 

그 말에 마키아스는 또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오면 저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이 흉작이었던 것도, 그리고 서부 지역이 특히나 심했던 것도 전부 사실이었기에. 물론 마키아스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잘 된 일이다. 애초에 마키아스가 증세 안건을 내놓은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최근 동부의 일부 귀족들이 세금을 착복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와, 그를 위한 정확한 정보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한 발판이었다. 아마 알바레아 경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의 이런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리는 그를 위한 협상 테이블인 셈이었다.

 

증세 제안을 철회토록 하지요.”

 

마키아스는 곧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현명한 판단, 고맙소.”

그 대신.”

 

가볍게 예를 표하던 알바레아 경에게 마키아스는 말하였다.

 

알바레아 경에게 하나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떠한 것을?”

 

그는 모르는 척 물어온다. 마키아스는 여유롭게 웃었다.

 

제국이 그렇게 흉작이었는데 농사가 잘 된 영지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그 방법을 알면 제국이 흉작이어도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이 열릴 듯하니, 부디 그것을 좀 찾아서 저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마키아스의 말에 알바레아 경은 피식 웃었다.

 

그것이라면 어렵지 않지. 좋소. 증세안만 철회해 준다면.”

 

협상 완료였다. 아마도 그는 마키아스의 뜻대로 해 줄 것이다. 다행히 알바레아 경은 반대파라 할지라도 일의 구분은 할 줄 아는 이였다. 마키아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길은 다르더라도 목적은 하나이다. 제국의 안위. 그 지점에서 안심이었다.

 

전쟁을 거치고, 군부를 거쳤다. 그 과정 속에서 마키아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완벽한 하나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사람은 너무나도 그 속내가 다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같지가 않다. 그 사람들을 완벽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혁명군을 모을 당시에도 그들의 목적은 다들 같지가 않았다. 그 같지가 않은 사람들을 하나의 목적으로 모으는 데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래서 마키아스는 재상 직을 받아들일 때에도 반대파에 대해서는 각오하고 있었다. 아니, 그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외려 과격해서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 이를테면 회귀파 같은 존재가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바레아 경은 그의 폭주를 막는 기제이며, 또한 다른 시점에서 방향을 보게 만드는 훌륭한 정치적 동료였다. 물론 귀족파들이 그를 대표로 내세운 것은 마키아스와는 다른 의도일 것이다. 알바레아 경, 유시스 알바레아는 마키아스의 오래된 친우(親友)였다. 귀족들이 그를 대표로 내세운 데에는 그 부분에 있어 유시스 알바레아의 설득이 다른 이들에 비해 유리한 기점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처음에 그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친우인 만큼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마키아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이라면 분명 자신이 반대할 지라도 듣지 않을 것임을. 하지만 결국 유시스는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귀족들의 꾸준한 설득도 설득이었지만, 거기에 서달라고 유시스에게 부탁한 이는 바로 그 친우였다.

 

하실 말씀은 이걸로 끝입니까?”

 

마키아스가 물었다.

 

아니. 본론은 이제부터외다.”

 

그가 대답하였다.

 

연설. 아무래도 철회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알바레아 경, 유시스는 그 말과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더 말은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하는 낯이다. 마키아스 역시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마키아스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말하였다.

 

재고해 주시오. 아무리 해도 좋지 않소. 공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마키아스는 결국 고개를 돌려 유시스를 보았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유시스의 시선에 덜컥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감내하는 것 또한 자신의 일이었다. 마키아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할 수 없습니다.”

 

마키아스는 단호히 대답하였다. 유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철회할 생각이 없다면, 하다못해 날짜를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답답한 듯 입을 여는 유시스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시스는 그 말이 마키아스에게 먹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던지는 부질없음이다.

 

이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만.”

 

마키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날, 그 시간이어야 의미가 있는 연설이라고 말입니다.”

…….”

 

마키아스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빛을 띄운다. 유시스가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더 이상 언질조차 하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의사 표시. 유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건 진작 알고 있었건만. 그럼에도 묘한 미련이라는 것이 그에게 포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아 있습니까?”

 

마키아스가 물었다. 그 말로 마키아스는 쐐기를 박고 있었다. 그 건은 그만 포기해 달라고. 유시스로서는 그 이상의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없소. 그럼 물러가지.”

 

유시스, 알바레아 경은 우아하게 뒤로 돌더니 곧 마키아스의 집무실을 나갔다. 문 닫는 소리와 근위병의 배웅하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마키아스는 한숨을 푹 쉬면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떻게든 넘겼나. 그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어떻게든 수습해야만 했다. 분명 그 날짜와 시간은 중요하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라 여러 번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그 쯤 되니 처음에 말리던 사람들도 곧 그를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방금 나간 유시스를 제외하고는.

마키아스에게도 이유가 있었고, 유시스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의견은 다르나 핵심은 하나이다. 그 날짜와 장소. 그것이기에 마키아스는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기에 유시스는 반대하는 것이다. 1030일 정오. 두 사람 모두 그것의 의미를 뼈저리게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날은 두 사람, 혹은 제국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 거대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들은 그 날 가장 소중했던 곳을 내전으로 인해 잃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렵게 되찾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끝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기로를 함께 뚫어오면서도 끝까지 그들은 서로의 곁에 남아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서로 대립하는 반대파이다. 하지만 실상은 동료 이상의 존재이다. 자신의 대척점에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그래서 마키아스는 그의 눈을 보면 흔들렸다. 자신의 너머에 있는 상대의,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 눈동자를 마주하면 두려워졌다. 모든 것을 걸기로 각오한 상태로 그의 모습을 보면 어느덧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의 그를 상상하게 된다. 마키아스 자신은 그가 대척점에 있었기에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제 각오의 안일함을 느낌과 더불어 조금 더 오래 그의 대척점에 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하지만 각오한 이상 그것은 무리다. 안 돼. 정신 차려. 마키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흔들려선 어쩌겠다는 거야. 마키아스는 제 볼을 세게 쳤다. 얼얼한 아픔이 뺨에 한 가득 퍼지며 겨우 제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유시스의 의지는 신경이 쓰였다. 설마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일까? 분명 회귀파에 대한 정보는 기밀이라 아는 이들은 제국 정보국이나 마키아스 자신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알고 보니 유시스가 그 파의 일원이다 같은 시시한 상상을 할 생각도 없다. 그러면 그냥 감이 좋았던 것뿐일까. 하지만 마키아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마키아스가 기억하기로 유시스가 특별히 감이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지금은 노르드 고원에 가 있을 마키아스의 또 다른 동료나, 제국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회색 기신의 주인 정도지 유시스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눈치를 챌 정도로 자신이 티를 내었던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아무래도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나름 잘 감추었다 생각했는데.”

 

마키아스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그는 표정 관리에 서툰 편이었다. 물론 그가 혁명, 그리고 정치판에 몸을 바치기로 다짐했던 이래 열심히 연습을 해 온 덕에 지금은 어느 정도는 제 의도를 감출 수는 있었다. 하지만 유시스는 과거의 자신을 아는 이다. 그로 인하여 보였던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키아스는 쓸쓸히 웃었다.

 

나도 모르는 것을 너는 보았나? 그래서 이리도 나를 붙잡는가?

그러나 붙잡힐 새도 없이 시간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

 

멍청한 놈!”

 

출궁하기 무섭게 제도에 마련된 제 사저로 들어간 유시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하인을 물리더니 침대 위에 있던 베개를 있는 힘껏 벽으로 집어 던졌다. 베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벽에 맞고 떨어졌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는 계속 씩씩대고 있었다. 어디서든 우아했을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러다 그 고집불통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유시스는 또 화가 치밀어 책상을 쾅 내려치려다 그만두었다. 진정해라. 그 놈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낼 것은 없지. 아무렴. 어렵게 그 속을 진정시키고 유시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말을 들어주지 않는가. 안 된다고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유시스는 답답했다. 그가 우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상조였다. 이래저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지가 얼마 전인데, 마치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저렇게 연설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부득불 그 날짜여야 한다고 우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직 혼란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정치적인 쇼를 벌이기에는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았다.

 

유시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얼마 전 만난 붉은 머리의 사내를 떠올렸다. 능히 아는 얼굴이었다. 제국 정보국 특무장관. 전 재상의 심복이었으나 그 능력의 필요성을 높이 산 마키아스에 의해 죽음을 면하고 살아 있는 이. 그가 유시스에게 접촉해온 것은 분명한 목적에 의해서였다.

 

불순한 무리가 있습니다. 레그니츠 나리를 노리는.”

 

당시 유시스는 흠칫 놀라면서도 물었더랬다. 그것을 반대파인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그 말에 남자는 웃었다.

 

레그니츠 나리의 보험이 당신인 것을 제가 모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보험? 영문을 모르겠군.”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주변을 잘 경계하십시오. 아무래도 내부에 협력자가 있는 듯 하니.”

협력자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대량의 무기까지 구입하며 척척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회귀파라는 그럴싸한 말은 붙였지만 결국 오합지졸 무리인데.”

…….”

새로운 제국에 있어 구 체제, 특히 군부의 신봉자는 장애입니다. 부디 색출에 힘을 써 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알바레아 경.”

그러는 그쪽도 군부의 잔해가 아닌가?”

 

유시스의 비꼬는 말에 남자는 그저 웃는다.

 

그 잔해를 새로 존재하게 한 것이 당신의 친우입니다.”

 

남자는 경쾌한 움직임으로 예를 표한 뒤 유시스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에 사로잡힌 것이 벌써 며칠이었다. 마키아스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을 그가 저에게 이런 정보를 전해준 것은 그것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마키아스의 의지인지 단순히 그의 장난질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시스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가 알고 있는 이상 마키아스가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어쩌면 이미 그것을 상정하고 움직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시스는 그것을 뛰어넘는 강력한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자신을, 그리고 그를 삼켜버릴 거대한 폭풍의 존재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 연설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때 남자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내부에 협력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유시스는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마키아스의 연설이라고 하는 정치적 쇼의 목적이 내부에 숨어 있는 그 협력자를 끌어내기 위함이라 한다면? 만일 자신이 그것을 미리 끌어낼 수 있다면 마키아스는 연설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위험한 폭풍에서 한 번 몸을 빼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유시스에게 그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유시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사고회로가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협력자. 조금 더 정보가 필요했다. 유시스는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했던 말은 3가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마키아스를 노리는 세력이 있다. 내부에 협력자가 있다. 대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무기를 제공해줄 만한 사람이라면 상당한 재력가이다. 그렇다면 상인이거나 귀족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상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부가 지배하던 당시 가장 먼저 탄압을 당했던 이들이 상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귀족인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유시스는 왜 정보국의 사내가 자신에게 접근하였는지를 깨달았다. 문제의 내부 협력자는 귀족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귀족 중 일부는 군부에 협력한 전적이 있으니.

 

그렇다면 다음 문제가 있다. 대량의 무기를 수급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귀족. 그렇게 하면 범위가 상당히 줄어든다. 이제 거기에서 일전에 잠시라도 구 군부에 협력한 적이 있는 이들. 하면 또 상당수 줄어든다. 유시스는 펜과 종이를 꺼내들었다. 추려낸 범위에 있는 귀족들의 이름을 기억나는 대로 써 보았다. 전부 기억해낼 수는 없겠지만 저렇게까지 범주를 줄이면 상당히 소수가 남기에 금방 써내려갔다. 유시스는 그 이름들을 쭉 읽어보았다. 그 와중에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까 마키아스와 증세 관련으로 협상을 했던 그 대화였다. 말을 돌려하긴 하였으나 마키아스가 내건 조건은 세금을 착복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잡는 것이었다. 이미 그나 유시스의 심중에 짐작이 가는 이들은 있었으나 그들이 얼마나, 혹은 어떻게 착복을 하였는가에 대해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파고드는 것에 있어서는 재상인 마키아스보다는 유시스나 다른 귀족들이 유리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단순한협상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나, 문제라면 그 심중의 후보들은 유시스가 적은 종이에도 쓰여 있었다.

 

설마.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2년간 제국에 있었던 흉작 때문에 세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 정부에서 귀족에게서 수취하는 공납 비율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기에 요 2년간 유시스 자신을 포함한 제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보냈다. 설사 여유 자금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풍족치 못한 생활이 2년 동안 지속된 실정이고, 귀족들이 통상적으로 상당히 비용이 크다는 것을 상정하면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할 정도의 여윳돈을 갖춘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돈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그것을 깨달은 이상 유시스에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유시스는 그 지독한 악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알고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 유시스는 곧 그 쪽에서 생각을 돌렸다. 아무리 그라도 설마 거기까지 생각을 하였겠는가. 그저 우연일 것이다. 그 우연히 맞물린 톱니바퀴가 운명을 향해 돌아갔던 것이리라. 유시스는 곧 저가 던진 베개를 주웠다. 그리고 하인에게 그것을 건네며, 새로운 베개를 가져오도록 명하였다. 곧 새로 빤 천으로 된 베개를 손에 넣은 유시스는 신발을 벗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눈꺼풀은 무거웠으나 잠은 쉬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알바레아 경이 움직인 듯 해. 오전 6시에 직속 비행선을 타고 바레아하트 쪽으로 떠난 듯 하다.”

 

하루가 지난 재상 집무실. 통신 너머로 렉터는 말하였다.

 

생각보다 빠르군.”

 

마키아스는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마침 의혹을 받고 있는 이들도 그 근방 영지의 귀족들이었으니 유시스는 어떻게 보아도 마키아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그 빠른 행동력에 박수를 쳐줘야 할까.

 

나리를 말릴 생각으로 만만인 것 같은데.”

 

렉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 심정 자체는 나도 비슷하지만.”

안 된다고 했잖아.”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니 그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날짜만큼은 바꿀 수 없어. 시간도 마찬가지이고.”

이상하게 그 날짜를 우긴단 말이지. 우리 재상 나리는. 다른 날도 많은데 말이야.”

 

렉터는 팔짱을 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는 다른 사람이었다면.”

날짜를 바꿨겠지.”

 

렉터의 다음 말을 알기라도 했던 듯 마키아스는 그의 말을 끊었다.

 

상징성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았을 테니까. ‘철혈재상은.”

 

마키아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렉터는 아차. 하며 난처한 듯 웃으며 사과하였다.

 

미안.”

하지만 나에겐 중요한 문제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도 분명 이 날짜는 의미가 깊은 날이니.”

…….”

이 제국이 상처를 딛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상처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 그를 위한 연설이다. 아픈 과거가 끝나는 것을 본 내가 할 수 있는.”

 

렉터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고집불통이야.”

이미 몇 번이고 들은 말이다.”

 

마키아스는 제법 지친 얼굴이었다. 요 며칠 연설을 준비하랴, 정무를 보랴 정신이 없었기에 피곤감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유시스라면 분명 그 협력자를 찾아올 거다.”

 

마키아스는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말하였다.

 

그럼 동시에 그들도 친다.”

호오.”

그렇게 하면 일단은 위협에서 벗어날 테니 그 날짜여도 특별히 문제는 없겠지?”

…….”

 

마키아스가 말을 마쳤음에도 렉터는 무언가 미심쩍은 눈치였다. 하지만 일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하자.”

 

그와 동시에 통신이 끊어졌다. 재상 집무실에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유시스도 렉터도 말려주는 건 고마웠지만 지금은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그냥 날짜를 미룰까. 계속 흔들리고 있는 마음은 그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말리려고 하는 부분에서 더욱 강하게 일었다. 그럴 때마다 마키아스는 눈을 감아 그들의 절실한 바람을 외면해야 했다.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누군가의 성의이다. 받아주지는 못할망정 쳐낸다는 것은 본디 인정이 많은 편인 마키아스에게 있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쳐내야만 살 수 있는 시기를 보내왔다지만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키아스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러다 그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이래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이나 하자. 마키아스는 제 앞에 쌓인 결재 서류들을 보았다. 아직도 할 일이 천지였다. 서류 처리는 물론이요, 오늘은 각 부서에서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도 받아야 했다. 마키아스는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1130. 곧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쌓인 일거리를 보면 그것조차도 요원할 모양이다. 마키아스는 제 머리카락을 쥐었다. 잘못하면 이거 퇴근도 요원할 것 같은데. 그는 곧 푹푹 한숨을 쉬며 서류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안건이 하나 둘 지나간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가 된다. 승인한 보고서를 옆에 있던 비서가 가지고 갔다. 그럼에도 또 한 무더기이다. 이 정도로 일이 쌓여 있으면 확실히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을 것이다. 시계의 초침은 몇 번이고 돌아갔다. 그 동안 기나긴 침묵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알바레아 경으로부터 막 보고서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그 때 들린 비서의 목소리에 서류에 서명을 하던 마키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펜을 멈춘 마키아스는 비서의 얼굴을 보았다.

 

읽어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자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극비사항이라면서요.”

 

그 말을 하며 비서는 마키아스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며 숨기는 것이라면 역시 하나겠지. 마키아스는 잠시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4시이다. 그럼에도 그 보고서가 온 타이밍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르다. 마키아스는 봉투를 뜯어 그 안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 귀족 내부 불순분자에 관한 보고사항.

 

그렇게 간단히 쓰인 제목의 보고서는 어떠한 경위로 그가 내부 협력자를 체포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간단히 정리되어 있었다. 탈세 의혹을 받은 이들의 명단과 더불어, 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력자가 새로운 무기를 구매하는 현장을 습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도저히 하루 만에 거둔 성과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봐. 농담이지?”

 

철도 우편으로 보낸다는 말과 함께 마무리가 되어 있는 그 보고서를 전부 읽은 마키아스는 실소를 터뜨렸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는 거냐. 이 남자. 아무리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이고 필요한 건 단서뿐인 상황이었다지만 하루 만에 체포라니. 너무 빠르다 못해 부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이 부자연스러움은 유시스 알바레아의 유능함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니. 이건 유능함만으로는 할 수 없다. 유시스에게 저를 말려달라고 여신이 부탁이라도 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착착 맞아 떨어진다. 그러니 영 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보부로.”

 

마키아스는 지체 없이 그를 불렀다. 지금 현 상황에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이는 그였을 것이기에.

 

불렀어? 나리.”

 

곧 통신 너머로 렉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즘 자주 부르네.”

그럴 만하잖나. 어떻게 된 거야?”

 

마키아스가 물었다. 렉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재상 나리.”

내부 협력자가 체포됐다.”

 

마키아스는 그의 말을 끊었다.

 

. 빠른데.”

 

렉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마키아스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손이라도 댔던 거냐.”

무슨 말일까.”

 

렉터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다.

 

지나칠 정도로 흐름이 완벽하다. 누군가 개입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그래서 나를 불렀던 거군.”

 

렉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하면 안 되니까 말해두는 거지만. 손은 대지 않았어. 유력한 루트를 몇 가지 알려줬을 뿐이다. 거기 중에서 하나를 잡은 건 유시스 알바레아 경이고. 마침 거기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건 그야말로 여신이 보우한 것이 아닐까.”

손을 대지 않은 게 아니잖나.”

 

마키아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댔다고 하려면 딱 한 군데를 찍어주고 여기란다. 정도는 해 줘야지. 나는 내가 아는 한의 길을 제시해준 것이지 손을 댄 게 아니야.”

다를 게 없잖아. 어쨌거나 너무 빨랐어. 부자연스럽지 않나.”

. 알바레아 경의 운이 너무 좋았던 셈 치지 뭐. 나도 이렇게 빨리 잡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렉터는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마키아스는 머리를 짚었다.

 

정말이지.”

, 그래. 그것 때문에 마침 나리께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어.”

 

그 말에 마키아스의 시선이 변하였다.

 

뭐지?”

나리가 아까 명령했잖아. 협력자가 붙잡히면 동시에 거기를 치라고.”

그랬었지.”

 

마키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 명령대로 그 셋은 감시를 하고 있었으니 체포되었던 현장 정도야 곧바로 보고가 되었단 말이야. 그래서 잽싸게 거기를 쳤단 말이지.”

그런데?”

아무도 없더라고.”

?”

 

마키아스는 몹시 놀라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 더미 일부가 흐트러졌지만, 마키아스에게 그것을 정리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거기였지 않나!”

맞아. 거기였지.”

 

렉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신처를 옮겼다는 건가.”

그것도 바로 어제 부로 옮긴 모양이야.”

우리 움직임을 눈치 챘던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렉터는 아쉽다는 듯 말하였다. 그 순간 마키아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좋지 않다.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 미루는 것이 좋을까? 마음속에서 갈등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예감을 느낀 것을 렉터 쪽에서도 알았던 모양인지 그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하였다.

 

나리. 이번엔 때가 아닌 것 같아.”

…….”

이로서 일이 터질 확률은 100%. 위험한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 하필. 마키아스는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위험도가 높아지니 현재 제 주장을 무조건 우길 만한 명분이 하나 사라진다. 모르는 이들에게라면 관계가 없지만 아는 이들이라면 분명히 말릴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마키아스 자신이 하려는 것은 이미 꺼내놓은 총구에 몸을 그냥 들이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어차피 날짜는 1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니 그 때를 노리는 것이 안전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미루게 되면 후회하게 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생각을 좀 해보겠다.”

현명한 판단을 기대할게.”

 

통신은 끊어졌다. 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보고서는 어찌 할까요?”

 

그 때 비서가 물어왔다. 마키아스는 지친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그것은 그냥 두십시오. 다른 것부터 합시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생각할 거리가 몹시 많아질 것 같았다. 마키아스는 다음 서류에 서명하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

 

노곤한 하루도 끝이 났다. 일을 하는 와중에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느랴 정신이 없던 마키아스는 궁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오스트 지구에 있는 주점 <갬지>로 향하였다. 주인이 있는 프론트 바에 털썩 앉은 마키아스는 맥주와 에델 프라이를 주문하였다. 재상인 마키아스 앞에서도 새하얀 수염의 주인장은 익숙한 듯 너스레웃음을 지으며 주문을 받았다.

 

요즘 좀 힘든가 보네. 평소엔 음료로 시키더니.”

 

주인장이 말하였다. 일국의 재상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으나, 마키아스는 별 생각이 없는 듯 그를 보며 핏 웃었다.

 

좀 그렇죠. 이래저래.”

하긴. 연설이라고 했지. 사흘 뒤였던가.”

그렇습니다.”

기대하고 있어. 여기 사람들 모두.”

 

마침 다 된 에델 프라이를 건네주며 주인장은 말하였다. 마키아스는 절로 머쓱해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기대는 무슨 기대입니까. 미숙하기만 한 것을요.”

이거 봐. 마키아스. 너는 오스트의 자랑이야. 조금 더 어깨를 펴도 된다고.”

암만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죠.”

 

주인장이 프라이와 함께 건네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마키아스는 말하였다.

 

이것 보게. 재상 정도가 자랑이 아니면, 나라라도 뒤집어야 자랑이라는 거냐? 이거야 원 무서운 재상 각하일세.”

그 뜻이 아니잖습니까!”

 

버럭 외치다가 마키아스는 크게 웃었다. 주인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 . 힘들겠지. 한 잔 쭉 마시고 잊으라고.”

잊는 것도 좀 문제입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마키아스는 맥주 한 잔을 비웠다. 그렇지. 그렇지. 주인장의 추임새가 들려온다. 거 아이처럼 대하는 건 그만두실 수 없는 겁니까. 마키아스가 한 번 더 핀잔을 던졌다.

 

어쩔 수가 없잖니. 아직도 너는 그 꼬맹이 같은걸.”

 

주인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기는 갬지의 주인장은 마키아스가 어릴 때부터 주인이었던 이였다. 그러니 아직도 어린애같이 보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키아스도 곧 마흔인데 이것은 조금 너무하다.

 

아무튼 기대하고 있다.”

 

마키아스에게 맥주잔 하나를 더 건네주며 주인장은 말하였다.

 

오스트 사람들도, 다른 제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게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너는 희망이니까.”

아저씨.”

 

마키아스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러니 마시고 푹 쉬어. 무슨 고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는 무슨. 주인장의 너털웃음이 이어졌다. 마키아스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마키아스는 제 앞에 있는 이들과 오스트 지구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그래. 회귀파가 다 무어냐.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군부가 무너지고 들어선 새 제국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새 희망을 줄 것이라고. 마키아스 자신이 그 연설을 기획한 것도 잃어버린 제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테러리스트가 무섭다는 이유로 자신이 몸을 빼었다간 이 사람들은 누구를 희망으로 삼으라는 말인가. 강행해야 했다. 설사 이 몸이 죽는다 하여도. 아무리 무지몽매한 자들이 재상 하나를 죽이려 할지라도 제국은 쓰러지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나른한 몸을 두고서도 정신만큼은 멀쩡하다. 마키아스는 생각했다. 어차피 테러리스트의 습격은 예상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경우의 수가 확실하게 남는다면 대비는 어렵지 않다. 연설은 진행한다. 거기에 한 치의 틀어짐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가로막는 이가 렉터든, 유시스이든. 혹은 제국의 영웅일지라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이상 마키아스는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에 대비를 해야 했다.

 

아저씨. 여기 술값이요.”

오늘도 고마워!”

 

여기에 앉아 있을 여유는 없다. 마키아스는 곧바로 술값을 지불하고 주점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마키아스는 주저 없이 제 집을 향해 걸었다. 레그니츠라는 문패가 있는, 아무 것도 없는 집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마키아스는 곧바로 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펜을 쥐고 종이를 펼쳤다.

 

생각. 생각을 하자.’

 

마키아스는 지금까지 상정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수를 떠올리기로 하였다. 테러리스트, 속칭 회귀파의 습격은 기정사실이다. 물론 그 날에 경비를 단단히 해두라 명은 하겠지만 원래 틈이라고 하는 것은 만들려고 마음만 먹으면 생기는 법이다. 언제 어디서 흉탄이 제 몸에 박힐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자신이 죽을 것을 가정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맞다. 어차피 자신이 살아난다면 그들은 무조건 체포될 것이다. 죽더라도 체포될 것이다. 정보부 사람들 정도라면 그들의 다음 은신처를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테니 그것에 대해서는 안심하여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이다. 지금 제국의 체제는 완벽하지 않다. 이 체제라는 것은 단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이 바꿔나가려 하는 제국의 모습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또한 그것을 망설임 없이 진행시켜나갈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딱 한 사람. 마키아스에게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이럴 때 하필 그 녀석이라니.”

 

마키아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는 지금 자신과 정치적으로는 적대하고 있는 유시스 알바레아였다. 그 이름을 종이에 적고 마키아스는 한동안 아무 것도 적어내지 못하였다. 그를 떠올리자마자 걱정이 되었다. 사무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 면모에서는 절대로 걱정되지 않았다. 마키아스가 걱정하는 것은 조금 더 다른 부분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영지나 다스리며 살겠다고 말하던 이를 이 판으로 끌어들인 것은 마키아스 자신이었다. 귀족파 편에 서는 것을 망설이던 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전부 지지 못하였는데 그에게 덜컥 이런 의무를 맡기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죽어버린 뒤이다. 혼자 남은 유시스가 어떻게 될는지 마키아스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맡긴다면 해 줄 것이다. 저가 죽을 때까지 맡겨진 의무는 이행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외로움을 대신해줄 수 없을 것이다.

 

…….”

 

괜찮은 것일까. 정말로 자신의 죽음이라는 짐을 그에게 떠안겨도 될까. 마키아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유시스를 대체할 만한 다른 이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찍으라고 여신이 인도한 것인 양. 정말로 그가 모든 것을 해 주기만 한다면 마키아스에게는 아무 걱정이 없는 셈이었다. 마키아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제국이냐. 아니면 유시스냐.

 

마키아스는 새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글씨를 썼다. 몇 개의 문장을 쓰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를 찢고 다시 쓰는 것을 반복하였다. 그렇게 몇 번 실수를 거치고 나서야 그럴싸한 글이 완성이 되었다.

 

- 소신의 목숨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부디 저의 후임은 유시스 알바레아 경에게 맡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키아스 레그니츠.

 

군더더기 없이, 깊은 의미는 보이지 않도록. 어렵사리 그것을 쓴 마키아스는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 품 안에 넣었다. 되었다. 이제 걱정은 없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괜찮다.

 

그럼에도 역시 이 짐을 떠안을 그에게는. 마키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너라면 분명 그것조차 의무라 생각하겠지. 그래서 너한테 맡길 수 있지만, 그래서 너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어. 마키아스는 품 안에 담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지금은 동부에 가 있을 이를 생각하였다.

 

 

 

 

 

 

 

**

 

레그니츠 재상!”

 

조회 시간에 마주한 황제는 어느 날보다도 밝은 얼굴이었다. 연신 보고되는 레그니츠 재상의 성과에 만족한 덕일지 아니면 단순히 오늘 기분이 좋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녕하십니까. 폐하.”

 

그에게 깊이 예를 표하며 마키아스는 살짝 웃었다. 황제, 세드릭 라이제 아르노르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말할 것이 없잖소. 경이 이렇게나 잘 해주고 있는 것을.”

 

아직 젊은 목소리의 주인은 활기차게 웃었다. 마키아스 역시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래도 소신을 너무 믿으시면 곤란하옵니다. 폐하.”

 

그런 그를 향해 마키아스는 넌지시 농담을 던진다.

 

어째서요?”

소신이 어느 날 총을 들고 폐하를 알현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하하. 경이 그러지 못할 담이라는 것 정도를 모르진 않소.”

 

얼핏 듣기에는 상당히 살벌한 이야기였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서로를 어느 정도는 신뢰하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만큼 현 황제는 마키아스를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다. 마키아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그래, 연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소?”

물론 아주 순조롭습니다.”

 

황제의 물음에 마키아스는 곧바로 대답하였다.

 

이대로라면 순탄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긴 하오만.”

 

하지만 대답하는 황제의 표정은 꽤 묘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마키아스는 의아해져 그에게 물었다.

 

무슨 심려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별 일은 아니외다.”

허면…….”

 

마키아스의 물음에 황제는 심란한 빛을 감추지 못한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는데, 잠시 떠오른 것뿐이오.”

어떠한 꿈을 꾸셨는지.”

 

마키아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황제는 난처하게 웃었다.

 

경이 죽는 꿈.”

…….”

그래서인가, 오늘따라 경을 보니 몹시 안심이 되오.”

 

마키아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인가. 마키아스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황제는 곧 안심하라는 듯 활짝 웃는다.

 

경은 여기 멀쩡히 살아있지 않소. 그러니 헛꿈인 게지. 그리 불안한 얼굴 하실 필요 없소.”

 

오히려 역으로 그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마키아스는 민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런 식으로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소신은 송구할 따름입니다.”

하하. 별 일 아니라니까요.”

 

황제를 향해 마키아스는 시선을 올렸다. 꿈 이야기 때문에 조금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 덕분에 결심은 확실하게 선 마키아스였다. 애초에 새 제국을 만들자 하였을 때 그를 재상으로 임명한 이도, 이후 그의 모든 결정을 지지해 준 이도 이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마키아스가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도 이 사람.

 

폐하.”

 

그러니 여기서 조금 더 분명히 해둬야 했다. 이 사람에게 자신이 없더라도 괜찮도록.

 

소신은 그리 간단히 페하의 곁에서 사라지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아무렴.”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아스는 살짝 웃었다.

 

허나 만일 소신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 말에 황제가 잠시 움찔한다.

 

제국이 그 때처럼 혼란에 빠질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옵니다.”

레그니츠 경.”

이전의 선례로 인하여 제국은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성패가 갈리는 그런 나라여서는 아니 된다는 결론에 이렀습니다. 제국을 지탱하는 이들은 수많은 국민들이며, 또한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소신은 그 사람들의 대표일 뿐입니다. 그 사람들이 소신의 입을 빌려 폐하나 사람들에게 의견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것에 대해서는 경이 지겹도록 설명을 하였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가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가. 황제는 한 쪽에서 드는 불안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각오 비슷한 것이 마키아스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레그니츠 경.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시오.”

 

결국 그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황제는 그를 재촉하였다. 마키아스는 그 말에 난처한 듯 웃었다.

 

특별히 폐하께 무언가를 아뢰려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그 때 황제는 왠지 이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미 열린 그의 입은 황제의 바람과는 달리 그 말을 곧바로 뱉어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심신을 강건히 하옵소서.”

 

아아. 결국 떠나려는 것이오? 그 말을 하려다 황제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이것을 잊지 마시옵소서.”

 

마키아스는 제 품에 담은 종이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황제는 의아한 빛을 감추지 않으며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보험이옵니다.”

 

마키아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하였다.

 

아마 큰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만, 만일 소신에게 어떠한 일이 생겼을 경우에 이것을.”

…….”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왜 이러는 것일까. 허나 보험이라고 하는 것을 어찌 하리오? 시국이 평안하다 하여도 이런 일에 대비하는 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그는 알겠다고 하며 그것을 제 품 안에 넣었다. 마키아스는 그것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요. 허면 보고 올리겠사옵니다. 폐하.”

좋소.”

 

본래의 목적을 잊을 뻔하였군. 이것저것 생각이 있었지만, 마키아스가 곧바로 올리는 보고의 내용을 들여다보며 황제는 곧 그에 대한 염려를 모두 잊었다. 보험이니 뭐니 하여도 이 사람이 제 곁에서 그렇게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확신하였다. 그저 대비가 철저한 사람이라 미리 걱정을 하는 것뿐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것은 보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황제는 마음속에 이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조마조마했다. 보고를 올리는 와중에도 계속 미심쩍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황제 덕에 마키아스는 그 때마다 저가 괜한 소리를 했나 후회를 해야 했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어찌 끝이 났다. 제 집무실로 다시 돌아온 마키아스는 문을 닫자마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릴 새도 없었다. 그의 앞에 쌓인 정무는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마키아스는 쓸쓸히 웃었다. 이 일들을 빨리 끝내고 나면 곧 연설 리허설도 해야 한다. 이 쯤 되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라는 지경이다. 돌아가시겠군, 정말이지. 마키아스는 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그나마 회의 같은 게 없으니 다행이다. 하기는 연설 때문에라도 회의를 이 때 잡는 건 피해야 했지만.

 

리허설이 오늘 몇 시였습니까?”

“4시 경입니다. 아직 아침이니 안심하십시오. 각하.”

 

비서에게 물으니 즉답이 돌아온다. 어지간히도 불안해 보였나. 마키아스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또 바쁘게 흘러간다. 서명 몇 개 한 것으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어느덧 점심을 거른 그는 비서가 제 옆에 둔 버거 하나로 어설프게 점심을 해결했다. 누가 보면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는걸.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였으나 마키아스는 딱히 그 상황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바쁜 시기이다. 특히나 요즘은 군의 재정비를 진행하는 중이라 더욱 그러하다. 새로이 편성된 정규군 안에서 군부의 잔재를 없애는 데에 주력을 하려니 아무래도 힘이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러다 마키아스는 아침에 황제에게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 쪽지가 하나만 있어서야 곤란하다. 자신이 부탁할 이와, 자신의 부탁을 받아줄 이 두 사람에게 모두 주어져야 완벽한 것을. 왜 여태 이걸 잊고 있었단 말인가. 마키아스는 스스로에게 황당해하며 근처에 있던 종이 하나를 꺼내들어 펜으로 그 쪽지와 같은 내용을 급하게 휘갈겨 썼다. 그리고 그것을 넣을 만한 곳을 고민하던 마키아스는 우연히 눈에 띄던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조그마한 서랍이라 필기구 의외에 물건은 들어가지 않아 거의 쓰지 않던 서랍이었다. 이럴 때에 다 쓸 일이 있군. 그렇게 생각하며 마키아스는 그것을 서랍에 넣고 서랍장을 닫았다. 이 책상에 누가 손을 댈 일은 특별히 없으니, 아마도 위치를 알게 될 사람 외에는 서랍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때에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마키아스는 만족하며 남겨진 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을 정리할 즈음에는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각하. 리허설을.”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마키아스는 즉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정무를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손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

 

마키아스는 비서와 함께 지체 없이 드라이켈스 광장으로 향했다. 드라이켈스 황제의 동상 앞에 마련된 연설회장을 향해 차근차근 걸어 올라간 마키아스는 연설회장 너머로 보이는 광장을 보았다. 거대한 건물들이 수도 없이 쌓여 있는 헤임달의 전경이 보였다. 내일은 이 앞에 사람들로 가득 차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마키아스의 귀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재상 각하잖아? 재상 각하야. 그래도 사람이 제법 있던 광장이라 그 목소리들이 가까워져 있었다. 마키아스는 그들에게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긴장은 되는지 마키아스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

 

준비된 대본을 간단히 읽고, 마키아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맞춰 도력 마이크 등의 배치가 이루어진다.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키아스는 광장 근처에 세워진 건물들에 하나하나 시선을 마주쳤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자신을 노릴 만한 사각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연설 리허설은 끝이 났다. 다행히 지금의 그에게 특별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기는 지금 일을 쳐봐야 의미가 없었다. 진짜배기는 내일일 테니까. 마키아스는 연설회장을 내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대로 합시다.”

. 각하.”

 

일하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키아스는 비서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집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괜찮을까. 현장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이 노릴 만한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것이다. 분명히 있을 터.

 

정보부와 방위군에 전한다. 내일 연설 시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수상한 자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체포하라.”

 

집무실 안 통신기로 그 말을 전하며,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등에 흐르던 식은땀이 멈추지를 않았다. 괜찮은 것일까.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려워할 시기도 이미 지나간 뒤였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

 

리허설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나니 어느덧 6시였다. 마키아스는 자리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오늘의 하루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으니, 젊은 재상 레그니츠는 제국의 흔한 평민 마키아스로 돌아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실까. 그렇게 계획을 짜고 있던 마키아스가 궁의 정문을 지날 무렵이었다. 광장 쪽에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는 분명하게 마키아스를 향한 것이었다. 마키아스는 멈춰 섰다. 그리고 저에게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시스.”

 

그 이름을 부르자 걸어오던 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지닌 푸른 눈으로 마키아스를 응시하였다.

 

보아하니 이제 돌아온 모양이군. 고생 많았어.”

 

궁 밖이니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다. 가볍게 유시스에게 말을 건네던 마키아스는 제 앞에 서 있는 유시스의 의장이 평소 볼 때와 달리 조금 가볍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실 보고는 이미 받았기에 유시스가 저를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었으나, 그 의장만 보아도 무슨 뜻으로 저를 찾아왔는지 마키아스는 간단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잠시 이야기를 해 줬으면 한다.”

 

친구로서.’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유시스의 분위기상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 생각으로 편안한 의장을 갖추고 마키아스의 앞에 나타난 것일 터.

 

마키아스와 유시스 사이에는 서로가 입으로 말하지는 않은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관계오래된 악우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치적인 사이로 만날 경우에는 친구로서의 관계는 사라지고, 친구로서 만날 때엔 정치적 적대 관계가 사라진다.

 

즉 지금처럼 친구로서 만났을 경우 그들이 서로 하는 말은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되는 셈이다.

 

좋아.”

 

마키아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일단 식사부터 하지. 그렇게 말하며 유시스가 마키아스를 데리고 온 곳은 번화가에 있는 어느 식당이었다. 번화가에 자리를 잡고, 맛도 있지만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었다. 그 덕분에 유시스와 마키아스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때 자주 이용하는 식당이기도 하였다. 시장하였지만 두 사람 다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였다. 이 가게에서 가장 일류다운 맛을 자랑하는 크림 파스타였다. 급사는 곧 음식과 더불어 주문한 포도주 한 병을 내어 주었다. 유시스는 그 포도주를 같이 주어진 두 개의 잔에 따랐다. 붉은 액체가 잔의 반을 찰랑이며 채운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네.”

 

유시스가 건네주는 잔을 받으며 마키아스는 말하였다. 유시스는 대답 대신 멍하니 잔 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는.”

 

그런 유시스가 내심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마키아스는 그에게 물었다. 유시스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잔에서 마키아스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새에 흔들렸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마키아스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마키아스는 왜 그가 저를 만나자 하였는지를 깨달았다.

 

내일이 연설이었지.”

 

, 역시나. 마키아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는 여전히 저가 그 연설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연설을 말리려 알바레아 공작은 회귀파의 내부 협력자를 체포하는 데에 협력을 했었다는 사실을 마키아스는 다시 떠올렸다. 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애써 다잡은 것이 또 흔들리고 말지 않나.

 

아아. 그래.”

 

마키아스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유시스는 시선을 내리며 말하였다.

 

미룰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

그래.”

 

유시스가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저에게는 아주 드문 감정의 표현이었다.

 

레그니츠.”

 

유시스는 그를 불렀다.

 

부탁이다.”

 

마키아스는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너무도 뻔하였다.

 

가지 마라.”

 

유시스의 한 마디는 마키아스에게 몹시 아프게 들렸다. 더군다가 그 유시스가 부탁이라니. 그와 오랜 시간을 지냈건만, 그가 마키아스에게 부탁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절실하게 닿았다.

 

내일이 아니어도 되지 않나. 네가 바라는 건 언제든, 네가 그 자리에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있는 것이 그 사람들이 진정 바라던 희망이다. 왜 그걸 모르나. 가지 마라. 레그니츠. 너는 가지 않아도 된다.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해해 줄 거다.”

 

유시스가 토로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마키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을 위해서는 이런 그를 쳐내어야 했다. 지독한 악우를 여기에 두고서 자신은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니. 갈 거다.”

 

마키아스는 단호히 말하였다. 유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째서냐.”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어. 나도 그것이 두렵다.”

 

역시 여기서 분명히 말을 해 둬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이쪽이고 저쪽이고 미련을 갖지 않는다. 마키아스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걸 극복해야 제국의 미래도 있는 것 아니겠냐. 언제까지고 거기에 사로잡힐 수는 없어.”

레그니츠!”

우리는 20년 전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거야. 기나긴 시간이었어. 이제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와야 해.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우리는 그걸 위해 싸워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잖아.”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널…….”

 

유시스가 그를 말리려 말을 꺼내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마키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말을 하다 말지.”

…….”

아무래도 뭘 들은 모양이네.”

…….”

 

유시스는 난처한 빛을 감추지 못한다.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들었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아무래도 이야기를 전하며 비밀로 해 달라 하였던 모양이다. 유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저가 들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멋대로 하지 말라니까. 그를 만나면 한 마디 해 주어야겠다 생각한 마키아스였다.

 

그렇게 모습을 감춘 이상 너를 노린다는 건 기정사실이지 않나. 대체 왜 미루지 않는 거냐. 내일이면 네가 존재치 않을 지도 모른다. 무엇하러 그런 위험한 길에 자처하여 가겠다고 하는 거냐.”

유시스.”

레그니츠. 너는 네 목숨의 무거움을 모른다. 네 그것은 이미 너만의 것이 아니다.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몸이란 말이다.”

알아.”

헌데 왜 이리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나.”

아니까 하는 거다.”

레그니츠!”

 

유시스가 결국 벌컥 화를 내었다. 마키아스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고서. 그 침착한 얼굴에 유시스는 더 화가 났다.

 

네가 내일이면 죽을 지도 모른다.”

알아.”

 

그렇게 말하는 마키아스의 얼굴은 침착했다.

 

그런데 왜.”

두렵지 않으니까.”

 

마키아스는 말하였다. 허세였다. 사실은 엄청 두려웠다. 그러나 그에게만큼은 그것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저를 이어가야 하는 이었다. 자신이 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이였다.

 

새 제국은 내가 없다는 이유로 흔들릴 제국이어선 안 돼.”

 

마키아스는 싱긋 웃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가야 한다.”

…….”

 

유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설득은 무용이라는 것을 그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식사를 하면서 침묵은 이어졌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본디 그것조차도 자연스러운 이들이었지만, 오늘의 침묵은 한층 무거웠다. 그러다가 덜컥 소리가 난다. 어느새 식기를 전부 비운 유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불러놓고 미안한 일이다만 먼저 가보겠다. 바람을 좀 쐬고 싶군.”

 

그렇게 말하는 유시스를 말릴 재간이 마키아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고 마키아스가 식비를 계산하고 식당을 나가는 일련의 시간 동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식당 밖을 나온 마키아스는 쓸쓸히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그도 머리로는 분명 납득하였을 것이다. 그 정도면 되었다. 그러면 이제 그 이상 그도 저를 막지는 못할 것이니까.

그럼에도 역시 미안한 감은 들었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연설이 끝나면 사과라도 해야겠다.’

 

마키아스는 제 자택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다짐하였다. 커피조차도 마시지 못하고 잠들 것 같은 밤이었다.

 

 

 

 

 

 

 

*

 

그리고 운명의 아침이 밝아왔다.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양치를 하고, 평소처럼 옷을 갖춰 입고 자택을 나선다. 간간히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사람들이 연설, 힘내라.’ 같은 응원의 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주며 마키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 일하는 발프레임 궁 안의 집무실로 향하였다.

그러나 오늘 집무실 앞에는 손님이 한 명 있었다.

 

유시……, 알바레아 경.”

 

놀랍게도 그 손님은 유시스 알바레아였다. 깔끔하게 예식용 의장을 갖춰 입은 그는 마키아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중요한 연설에 귀빈이 없어서야 곤란하지 않겠소.”

 

유시스는 그렇게 말하였다. 마키아스는 피식 웃었다.

 

귀빈이라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귀빈이지요.”

허나 각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을 국민들이 바라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 말에 마키아스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속으로 생각하며 마키아스는 그에게 일단 들라며 집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행히 안에 비서는 없었다.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집무실에 들어서서 문을 닫자마자 마키아스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유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보며 말하였다.

 

귀족의 대표 되는 이로서, 재상 각하의 연설을 가까이서 보러 온 거다.”

연설을 굳이 꼭 가까이서 볼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도력 라디오로 생중계되기도 할 거고.”

 

마키아스는 난처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솔직히 아침 일찍 자신보다 먼저 집무실 앞에 나타난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오히려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나면 절로 머쓱해졌다. 그가 이렇게 움직여야 할 정도로 걱정을 시킨 것일 테니까. 마키아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할 테니까.”

내 눈에 찰 정도로는 분발하도록.”

 

그 와중에도 밉상이로구만. 마키아스는 한숨을 푹푹 쉬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몇 가지 간단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곧 출근한 비서가 들어왔다. 비서는 마키아스의 곁에 서 있는 유시스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한다. 그러다가 연설을 지켜보러 왔다는 그의 말에 별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은 채 제 일을 하였다.

 

벽에 있던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가. 마키아스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키아스가 채비를 갖추고 움직이는 모양을 유시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집무실을 나가자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그는 마키아스를 따라 움직였다. 멀찍이서 저를 천천히 따라오는 유시스에 신경이 쓰이던 마키아스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았지만, 무슨 일 있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의 유시스를 보고 나면 할 말조차 잊는 채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상황은 의장을 갖출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대체 왜 옷 입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는 거냐!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러지도 못하던 마키아스는 마무리가 끝나자 유시스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 때 마키아스는 이유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유시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걱정 마. 별 일 없을 테니까.”

 

푸른 눈 안에 가득 담긴 염려를 떼어내려 마키아스는 말했다.

 

나는 너를 걱정해서 온 것이 아니다. 한심하게 실수나 하지 않도록 지켜보러 온 것이지.”

 

그러자 유시스는 아니라는 듯 맞대응하였다. 평소였다면 저 자식.’하며 한 번이라도 씹었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오히려 그렇게 나와 주지 않으면 더 괴로워질 뻔했다. 마키아스는 결국 푸핫 웃었다.

 

그렇지. 그래야 너지. 안심했어.”

안심?”

 

그 말에 유시스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갑자기 머리라도 나빠진 것인가? 나는 너를 감시하러 온 거다. 조금은 더 자각을 갖고 임하지 그런가.”

알바레아 경!”

 

근처에 있던 비서가 유시스를 다그쳤다. 마키아스는 그런 비서를 제지하였다. 비서는 억울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마키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유시스는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준비는 모두 마쳤다. 마키아스는 유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품에 있던 도력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레그니츠입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방위군에게 건 통신이었다. 곧 이상 없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정보국에 통신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움직임이 없다.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연설이 모두 끝나고 돌아갈 때까지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1130. 잔뜩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마키아스는 발프레임 궁의 문 앞에 섰다. 문지기들도, 뒤에서 그를 따르는 수행원들도 잔뜩 긴장한 분위기였다. 방위군 분위기도 묘하게 살벌하다. 경계를 강화시켜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키아스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은 근처에 있던 검은 리무진에 꽂혔다.

 

어찌 된 일이지? 저런 걸 준비하라 한 기억은 없는데.”

 

마키아스가 물었다. 그 때 리무진 근처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어디까지나 대비야. 대비.”

광장은 코앞인데 왜 이런 것까지 가지고 온 거야.”

 

마키아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저격 위험은 어디에나 있잖아. 나리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알지만 오늘만 좀 참아줘.”

…….”

그럼 나는 방위를 위해 먼저 가 볼게.”

 

렉터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렇게 나와 버리니 틀린 말도 아닌 지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근처에 있던 유시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이것만큼은 수가 없나. 마키아스는 어쩔 수 없이 그 검은 리무진에 탑승하였다. 고위 관료를 위한 것이라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아늑하게 되어 있다. 재상이 된 이후로도 한 번도 이런 데에 타보지 않았던 마키아스는 묘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135. 거대한 궁의 문은 열리고 리무진은 출발하였다. 차량은 천천히 궁을 빠져나가 드라이켈스 광장까지 달렸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바깥 풍경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량 통행을 위해 임의로 만들어둔 길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람들이었다. 온 제도 사람들이 다 여기 모인 것은 아닐까. 그런 착각마저 들면서 마키아스는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암만 해도 역시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다음에 리무진 타라는 소리 한 번만 더 해봐라. 그가 내심 이를 갈던 사이에 리무진은 멈추었다.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정말. 이런 것도 다 낭비라니까.

 

다 왔습니다. 각하.”

 

운전수의 말을 들은 마키아스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마침 열린 리무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너머에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마키아스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다시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섰다. 마키아스는 주먹을 꽉 쥔 채 연설회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시간은 어느새 1150. 연설회장에 올라선 마키아스는 제 앞에 펼쳐진 드라이켈스 광장, 그 너머의 제도를 바라보았다. 헤임달. 붉은 수도. 영광스러운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을 지탱해 줄 사람들. 마키아스는 그 풍경을 제 눈에 가득 담았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잊어서는 안 될 풍경들을 그대로.

 

각하. 곧 시간입니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키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재상 각하를 연발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난처할 정도로 기분 좋은 소리다. 마키아스는 잠시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를 지켜보는 수행원들과 비서가 있었다. 자신에게 믿음의 시선을 주는 이들. 그리고 그 너머에 유시스가 있었다.

 

걱정 마. 마키아스는 그에게만 보이도록 입을 열어 말하였다. 유시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이다. 마키아스는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제 앞에 마련된 단상으로 걸어갔다.

 

정오. 운명의 시간이었다. 마키아스는 사람들을 한 번씩 전부 돌아보았다. 너무도 많은 얼굴들이라 다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이 전부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마키아스가 연설의 첫 마디를 떼었다.

 

그 순간, 마키아스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였다. 저 멀찍이 보이는 한 건물.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각 지대에서 저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고 있는 검은 라이플이 보였다. 아차.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죽음 직전에 갑자기 동체 시력이 좋아지기라도 하였던 것일까. 마키아스의 시선에 그 탄환이 저에게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뒤에 있던 유시스가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 모든 상황이 마키아스에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유시스한테!’

 

마키아스는 선택해야 했다. 유시스를 막느냐, 아니면 유시스를 방패막이로 삼느냐. 선택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시스는 이미 각오하고서 저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니 그를 내버려두면 자신이 살아날 확률이 몹시 높아진다. 하지만 죽든 죽지 않든 유시스의 몸이 성할 리가 없다. 그리고 유시스를 쳐낸다면 마키아스 자신이 해를 입는다. 친구를 희생시키고 살아남느냐, 아니면 그냥 총탄에 목숨을 달리 하느냐. 마키아스는 생각했다. 살고 싶다. 그 생각에는 거짓이 없었다. 계속 살아서 제국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의 친우가 죽거나, 혹은 상처를 입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선택지가 희생이어야 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살아남는 게 마키아스 자신이면 안 된다.

 

안 돼.”

 

마키아스는 저를 밀치려 손을 뻗던 유시스를 도로 밀어냈다. 유시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것이 보임과 동시에, 그의 가슴에 거대한 고통이 박혀 들어갔다. 마키아스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았다. 광장을 메우던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술렁거림이 마키아스의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의사를 불러!”

 

비서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아마 무용일 게다. 라고 마키아스는 그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아. 이게 죽는 감각인 것인가. 마키아스는 웃고 싶었으나, 고통으로 경직된 얼굴은 그것조차 허용치를 않는다.

 

레그니츠!”

 

너무도 아파 가슴을 움켜쥐던 마키아스는 결국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넘어졌던 유시스가 쓰러진 그를 제 무릎으로 받치고 있었다. “레그니츠!” 유시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키아스는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웃었다. 지금은 또 웃어지네.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어째서냐, 레그니츠!”

 

유시스가 그를 깨우려는 듯 흔들었다.

 

흔들지 마. 머리가 울린다고.”

 

마키아스는 힘겹게 말했다. . 신기하다. 말이 나와.

 

왜 나를 밀쳤나, 레그니츠.”

 

유시스가 물었다. 마키아스는 웃었다. 입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말해주고 싶었다. 네 얼굴 엄청 엉망이다. 울려면 울던가, 말려면 말던가. 하나만 해. 라고 놀려주고 싶었다. 마키아스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현실 감각과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제 생명의 끈이 점차 끊어지고 있었다.

 

유시스.”

 

마키아스가 그를 불렀다. 유시스는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마키아스의 눈가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마키아스였다.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땀에 잔뜩 젖은 그 손은 따뜻했다.

 

가지 마.”

 

가지 마라. 레그니츠. 마키아스의 눈에는 어제 보았던 유시스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면 안 되지. 마키아스는 지금 자신의 생명이 줄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아프지 않은 척, 웃어도 보이면서.

 

책상 왼쪽 첫 번째 서랍.”

 

미안. 모든 걸 너에게 맡겼어. 부디 살아줘. 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하였다. 이제 한계였다. 가슴을, 온 몸을 가득 메우던 고통이 마키아스에게서 점차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그리고 시야가 점차 어두워진다. 레그니츠! 하며 저를 부르던 유시스의 얼굴이 점차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안개 너머로 그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윽고 마키아스의 눈에는 아주 캄캄한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는 살아줄 것이다. 그러니까.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마키아스의 몸이 유시스의 위로 힘없이 무너졌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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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은 몹시 많으나

지금은 그저 원고를 끝냈단 생각밖에 안 드는군요. ! ! (기쁨)

이 글은 <백일몽>의 이전 시점으로 마키아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름대로 아련한 과거편을 쓰려고 했던 게 제 첫 계획이었습니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치물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제가 바라던 둘의 관계(대척점에서, 서로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이들)를 잘 보여준 것이 맞는가? 같은 의문은 조금 들지만 나름 괜찮은 이야기를 뽑아냈다는 사실에 만족을 하려고 합니다. 글을 쓸 때에 가장 초점을 두었던 부분은 이 책 자체로도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여야 하고, 그 와중에 <백일몽>에서 부족하였을 지도 모르는 부분의 보충을 해야 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 산으로 가기 쉬운 목표이긴 한데 어찌 이루어 낸 것도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 두 글은 퍼즐 같은 느낌입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면서도 둘을 붙이는 순간 완벽해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쓴 글이기도 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더라면 좋겠습니다.

. 이걸 구입하여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또 다음 책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카사 올림

 

Special Thanks to.

 

복돼님. 가위님.

루청이들. 유자님, 에버님. 이번에도 좋은 표지 해준 내 동생 수레.

예비 테러 목표 Falcom

 

Twitter: @machi_no_kiseki

본 책은 환불이 불가하며, 파본으로 인한 교환만 가능합니다.

교환은 행사 당일에 한해 부스에다 에너지 쉘을 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새하얀 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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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감옥. 그 안에는 사람 한 명만이 있었다. 간수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나갈 수도 없는 차디찬 옥 안에 팔에 수갑을 찬 채로 갇힌 남자는 무감각한 눈으로 통로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들어오는 사람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다. 곧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어둠에 익숙해진 남자의 눈에 어떠한 이의 모습이 비치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남자는 크게 웃기 시작하였다.

 

크큭. 아무래도 우리가 성공한 모양입니다. 알바레아 공.”

 

알바레아 공이라 불린 이, 유시스는 남자를 보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말하는 죽은이가 누구인지는 이 시점에서 굳이 입을 열 필요도 없으리라. 이 작자를 포함한 그 어리석은 이들에게 죽은 이는 지금 궁 안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것 보시오. 내 전에 말했잖소. 나를 붙잡는다고 하여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그래. 덕분에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거다.”

 

곧 유시스는 얼굴을 고치고 피식 웃었다. 끌고 와라. 유시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곧 사슬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병사들과 함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유시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옥 안의 남자는 그 얼굴을 보더니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네 동료들 전원이 죽음을 함께 해 줄 것이니.”

 

유시스가 웃었다. 그리고 옥의 문이 열렸다. 병사들에게 끌려 들어간 이들은 사슬로 꽉 조여진 채 남자와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남자가 그들에게 물어도 그들은 유구무언이었다.

 

더러운 혀라면 진즉 뽑았다. 의사소통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알바레아 공!”

 

남자는 유시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주제도 모르고 재상 자리에 눌러앉은 미천한 자를 벌하였소. 과거의 영광을 이룩하는 데에 한 걸음 더 나아갔지! 헌데 그런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소이까? 영광스러운 제국 귀족이 위로 군림하는 세상. 그리고 그 아래 모두가 무릎 꿇는 세상! 우리는 거기로 나아가려는 것이오! 헌데 그런 우리를, 제국의 귀족인 공이 막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이오?”

 

유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들을 필요도 없는 궤변에 시대착오적인 생각까지 더해져 들어주기조차 시간 낭비였다.

 

그래. 열사 기분은 충분히 느꼈나?”

 

유시스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 말하는 모양새를 보아 살려줘야 할 일말의 가치조차 없다는 건 알겠군.”

죽음이 두려울 것이라 생각하시오?”

 

남자는 그를 노려보았다.

 

너희가 죽음이 두렵던 두렵지 않던.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유시스는 말하였다.

 

다만 너희가 하고 있는 큰 착각이 하나 있지.”

 

유시스는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장갑을 고쳐 꼈다.

 

너희가 바라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사슬에 묶인 남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허황된 꿈은 집에서나 꿀 것을.”

 

유시스의 시선이 매섭게 그들에게 꽂혔다.

 

망상을 바깥까지 끌고 와 죄 없는 이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런 너희의 죄에 비해 처형이라는 형벌은 가벼운 것이나, 그렇다고 너희를 살려서 고통을 일일이 줘야 할 만큼의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군.”

…….”

너희가 죽인 남자의 목숨 값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느끼며 죽도록.”

 

그 말을 끝으로 유시스는 뒤로 돌아섰다. 그는 근처에 있는 병사에게 말하였다.

 

극형에 처할 자들이다. 감시에 소홀함이 없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어두운 통로 너머로 유시스는 사라졌다. 감옥에는 곧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

 

옥에 갇힌 이들이 극형에 처해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레그니츠 재상의 뒤를 이어 새로이 재상에 오른 유시스 알바레아는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그것을 처리하였다. 제국 정보부의 정보와 당시에 재상을 지키던 방위군들의 활약으로 문제의 테러리스트는 전원 체포되었다. 레그니츠 재상을 잃고 침체된 제국민들에게 있어, 그들의 극형 소식은 누구보다도 반길 만한 것이었다. 그들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날 광장은 여러 의미로 소란스러웠다. 천인공노할 놈들! 죽일 놈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더불어 돌을 던지는 이까지 등장하였다. 문제의 테러리스트들은 처형대에 올라 제 목숨을 상실하는 그 순간까지 저들이 죽인 이의 무게를 실감해야 하였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 슬픔이 시민들을 더 흥분케 하였던 것일지 모른다.

 

그 이후로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하였듯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황제가 알바레아를 재상으로 삼는 것부터 일을 수습하는 모든 과정까지. 마치 그 두 사람만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양 이루어졌다. 그 움직임에 의문을 지니는 이도 있었으나, ‘레그니츠 재상의 유지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은 잠재워졌다. 그럴 법도 하였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이 죽은 뒤까지를 모두 대비하고 있었음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났으니.

 

레그니츠 재상의 장례는 발프레임 궁 안에 마련된 영안실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리 재상이었다 하더라도 평민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큰 영광이 아니냐는 말도 소수에게는 나왔지만, 그가 하였던 업적에 비하면 이조차 적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이들에 의해 그 의견은 묻혔다. 그러한 사소한 일들은 뒤로 하고서 그의 장례는 성대히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오스트 지구에 있는 그의 생가 뒤편 마당에 묻혔다. 황제는 성대히 묘를 만들기를 원하였으나, 레그니츠라면 그것을 원하였을 것이라 강력히 주장하였던 유시스 덕에 성사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를 추모하길 원하는 이들을 위해 국립묘지에 그의 추모비를 만들어 두었다. 그러한 중도책으로 무사히 그의 장례를 마쳤다.

 

그리고 유시스 알바레아는 그가 묻힌 땅 앞에 있었다.

 

레그니츠.”

 

더 이상 제 말을 듣지 못할 이에게 유시스는 말하였다.

 

나는 너를 지킬 거다. 네가 준 모든 것을 지킬 거다.”

 

유시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더라도 반드시.”

 

붉은 석양을 등진 채로 그는 천천히 죽은 이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제 뒤를 따라오는 집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부터 여기에 머문다.”

? 하지만…….”

 

집사가 놀란 듯 되물었다.

 

반론은 듣지 않는다. 자네는 메이드들과 함께 채비를 갖추어 바레아하트로 돌아가도록.”

허나 주인님.”

본가로 가 그 아이를 돌보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유시스의 추상같은 얼굴에 집사는 하릴없이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을 레그니츠 가는 새 주인을 맞이하였다.

 

 

 

 

 

 

+

 

각하. 살려주십시오.”

 

낡은 옷차림의 의사는 남자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여 엎드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행되어 저로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각하. 송구합니다. 부디 목숨만은.”

 

칼 같다고 칭해지는 알바레아 재상의 소문을 들었던 모양일까. 목숨을 구걸하는 의사의 모습은 비굴함을 넘어서 안타까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남자, 유시스는 의사를 보았다. 의사는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이 그에게는 몹시 다행으로 여겨졌다.

 

내가 그대를 왜 죽이겠는가.”

 

그 말에 의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오히려 수고하였다 상을 주어도 모자라는 일이지. 가는 길에 주는 것을 받고 돌아가도록.”

 

, 감사합니다! 의사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윽고 집무실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유시스는 웃었다. 잠긴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그의 웃음소리는 답답하게 들렸다. 하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후련하여 보였다. 유시스는 기뻤다.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오히려 생각보다 더더욱 빨리 와 주었다. 그것이 이리도 기쁠 수가 없었다.

 

레그니츠. 레그니츠! 유시스는 속으로 제게 짐을 넘겨준 이를 불렀다. 그가 남기고 간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유시스에겐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 맹세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 남겨진 것을 이행하는 것으로 유시스는 제 친우가 사라진 것을 잊으려 하였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의무를 이행하면 할수록 그의 존재감은 커져만 갔다. 가슴 한 구석에 크게 뚫린 구멍에서 친우에 대한 그리움이 새어 나갔다. 의무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허함을 견뎌내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다 보니 유시스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날의 기억이 떠나지 않았다.

안 돼. 그는 그렇게 말하였다. 말릴 수 없다면 대신 죽고자 하였던 유시스의 마지막 의지조차 그에게 부정당하였다. 그러고서 그가 유시스에게 남겨준 것은 제국의 미래였다. 원래였다면 자신이 아닌 그가 보았어야 하였을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미래. 그것은 원래 유시스가 누려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것이었다. 유시스가 바랐던 것은 그저 그 미래의 파편을 바라보며, 찬란한 미래로 인하여 행복할 이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멀리 돌아와 있었다. 그의 친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친우의 자리를 가로채, 그 대신 그가 누렸어야 할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모순된 일이란 말인가.

 

레그니츠. 나는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니 이 정도는 네가 양해해라. 유시스는 싱긋 웃었다.

하얀 죽음의 꿈이 그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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