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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마키] 白日夢 본문

S.Kiseki

[유시마키] 白日夢

Talsoo 2019. 9. 18. 21:37

(표지파일이 없네요....)

 

2014.11.23일... 아마 케스였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 때 판매했던 유시마키 책입니다.

 

섬의 궤적 1, 섬의 궤적 2의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대파티입니다.

 

섬3 시작한 기념으로.

낸지 벌써 5년이 지나서... 무료공개합니다.

 

 

...더보기

 

몸은 깊은 바다 속에 있었다. 무언가에 끌려 내려가듯 온 몸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 그 한 가운데에 몸을 둥둥 띄우니 품고 있던 온갖 생각들이 빠져나가 심연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러면 여태껏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온갖 것들로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묘한 안정감과도 같았다. 그러나 곧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모두 한 순간이요, 자신은 결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할 것임을. 하지만 잠시나마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그래. 좋은 일이다. 머릿속이 빈다는 것은. 온갖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

 

소리도 무엇도 없어야 할 심연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하나 들린다. 그저 소리의 집합에 불과할 그것은 이윽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의 소리가 되어 그의 비어 있는 심연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유시스.

 

몹시 그리운 목소리였다. 그것을 인식하자 곧 거대한 심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깊이 빠져들던 바다도 어느덧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것은 방금까지 누워 있던 붉은 천의 소파, 그리고 서류라는 이름의 종이 더미들이 가득 쌓여 있는 테이블. 그리고 그 자신이었다.

 

, 유시스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때때로 그는 이런 식으로 잠에 빠지고는 했다. 평소엔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하는 데 낮 2시만 되면 거짓말처럼 잠에 든다. 그리고 저는 잠에 든 것조차 모르는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깊은 심연 속에 제 몸을 맡긴다. 그러다가 깨는 것 또한 항상 같은 목소리이다. 유시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어느 목소리. 유시스는 시계를 보았다. 230. 늘 똑같았다. 2시에 잠이 들고 230분에 그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이 알 수 없는 현상은 지금의 유시스에게는 거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어떻게든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시간만 되면 잠이 든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렇게 되고 마니, 결국 유시스는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잠이 들지 않으면 이상한 수준까지 되어 있었다.

 

유시스는 시계를 다시 보았다. 시간은 여전히 230. 한숨을 한 번 쉬고 그는 서류가 쌓인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많이들 쌓여 있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이 건의 승인을 해 달라. 저 건의 승인을 부탁한다. 각기 다른 이들의 다양한 요구들이 주요 내용이었다. 유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몇 가지 서류에 서명을 하였다. 나머지는 가당치도 않은 내용이라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았다. 각하라고만 하면 아래의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문득 유시스는 벽의 한 부분을 다 채우고 있는 집무실의 창문을 보았다. 넓게 마련된 창문 아래로 제도(帝都)의 거리가 보였다. 드라이켈스 대제의 동상 아래에 광장. 익숙한 듯 몹시 낯선 거리이다. 유시스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뜨면 똑같은 정경이 보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한다. 원래 이 방의 주인이었을 이 역시 이 광경을 보았으리라. 유시스는 곧 쓸쓸한 웃음을 띤다. 어쩌다가 지금 이 집무실을 자신이 쓰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방의 주인은 유시스 자신이었다. 적어도 그 주인 자리에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유시스.

 

또다. 그것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유시스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알아도 결국은 이런 식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목소리는 꿈이요, 돌아본 자리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현실인가. 아니면 그 반대일지 모른다. 유시스는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펜을 쥔 손에 잡힌 자잘한 주름들이 그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현실은 이곳에 있었다.

 

 

 

 

 

 

 

 

백일몽白日夢

 

 

 

 

 

***

 

이봐, 유시스.”

 

눈을 감고 있던 유시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유시스가 있던 곳은 그의 기억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는 넓은 정원 한가운데 있던 거대한 나무에 등을 댄 채 자고 있었다. 이 기억은 묘하게 익숙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유시스의 옆에 누군가 앉았다. 누구더라.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암만 사람들이 피곤해도 이런 데까지 와서 자면 어떻게 하냐?”

 

아무래도 유시스는 무언가를 피해 도망쳐 나온 모양이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다. 아마도 뭔가 거북한 연회였을 것이다. ''는 그런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일 테다.

 

필요하면 알아서들 찾겠지. 나를 찾으려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고.”

나 참.”

 

낯설지 않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지금의 너 정도면 그래야 하겠지만.”

, 너에 비하겠나.”

 

유시스는 핏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햇빛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는 유시스를 한 번 보더니 웃었다. 눈이 부시던 중에도 그의 입가에 자잘하게 패인 주름이 보였다. 어느덧 그런 나이가 되었던가. 유시스는 한 번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유시스가 있던 곳은 여전히 그 집무실이었다. 그는 어느 새인가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을 하려다 만 흔적이 보인다. 그 짧은 새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유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이렇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자꾸만 모호해진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시스는 이마를 붙잡으며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어떻게든 앞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책상 위로 무너졌다. 부딪힌 어깨가 아팠지만, 그보다도 머리에 일렁이는 고통이 문제였다.

 

알바레아 경!”

 

바깥의 근위병이 소리를 듣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근위병은 쓰러져 있는 유시스를 보고 잔뜩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유시스는 애써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보아하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이다.

 

아무 일도 아니다.”

 

애써 그렇게 말하였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만 물러가라.”

하지만…….”

괜찮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그의 푸른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근위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알겠다는 말을 전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유시스는 호흡을 천천히 하였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진정은 되는 듯 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일시적인 발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시스는 다시 팔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겨우 책상 앞에 앉을 수는 있었다. 어느 새 잉크가 쏟아져 그의 소매 끝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보던 유시스는 목 안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손에 뱉었다. 검붉은 피가 소매 위로 떨어졌다. 푸른 얼룩 위에 묻은 핏방울의 모양이 몹시 기묘하다. 유시스는 쓸쓸히 웃었다. 점점 그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시스.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유시스는 난처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웃었다.

 

너도 날 걱정해주는 건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 그것으로 좋다. 작게 중얼거리던 유시스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어느 새 6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쌓여 있던 서류들이 전부 처리되어 있음을 확인한 뒤에 집무실을 나갔다. 넓고도 답답한 방의 문이 닫히고 유시스는 궁 밖으로 나왔다. 해가 일찍 진 한겨울의 밤하늘을 보고 나니 유시스는 또 하루를 보냈음을 실감하였다. 유시스는 제 소매를 보았다. 푸른 얼룩 위에 붉은 얼룩. 이 옷은 못 써먹겠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의 입 안에서는 쓴맛이 났다. 유시스는 그것을 도로 삼켜냈다. 목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끔찍했다.

 

지병으로 인한 발작이라 하였다. 치료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며, 살려 달라 처절하게 외치던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대를 왜 죽이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의사를 돌려보낸 유시스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만족감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는 조만간 죽는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그 날' 이후로 거의 의무감으로 살아왔던 삶이다. 그 의무감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몸을 돌보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동일까. 그 이후로 심연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그의 몸은 이제 여기저기 갉아 먹힌 영혼을 유지할 힘조차 상실하고 만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이라니 과연 인간이란 놀라운 존재였다.

 

광장에서 도력 열차를 탄 뒤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선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유시스는 눈을 감고 제 몸을 그 소음에서 차단하였다. 익숙한 행위였으니 어렵지 않았다. 고요가 잠시 지나가고 답답한 시간이 끝이 났다. 이번 정류장은 오스트 지구입니다. 기관사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유시스는 마침내 도력 열차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오스트 지구. 제도 내에서도 주로 가난한 평민들이 거주하는 골목이었다. 제국의 4대명문이라 불리는 귀족가 출신에게 있어서는 크게 인연이 없을 곳이었지만, 그의 은 그 곳에 있었다. 유시스는 조금 걸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익숙한 집이다. 건물 자체는 오스트 지구의 다른 건물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냥 흔한 주택이었다.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현관문 옆에 조그맣게 쓰인 글자 정도일까. Regnitz. 누군가 흘겨 쓴 글씨를 흘끔 보던 유시스는 문을 열었다.

 

두 사람 정도가 머물 법한 자그마한 집 안 곳곳에는 진한 커피향이 배어 있었다. 집 안에 들어온 유시스는 거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온 방에 가득한 커피 향을 맡았다. 온 집 안에 진동하는 냄새라 잠시 맡기만 해도 절로 아찔해지는 것 같다. 몸이 약해져서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유시스는 비틀거리며 소파 위에 앉았다. 머리를 짚으며 잠시 앉아 있던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향했다. 개수대 위의 찬장의 문을 열어 티 포트를 꺼내, 거기에 물을 채웠다. 불 위에 포트를 올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 찻잎을 넣었다. 곧 물이 끓는 소리가 났고, 유시스는 포트의 물을 찻잔에 부었다. 투명한 물은 찻잎이 우러남에 따라 점점 주홍빛으로 변하였다. 유시스는 그것을 들어 소파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곧 찻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한 입 머금었다. 홍차의 향은 집안에 진동하는 커피 향과 섞여 그 나름 묘한 내음을 냈다. 그것를 음미하다 유시스는 또 목 아래에서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찻잔을 테이블 위에 빠르게 올리고, 그는 제 입을 막으며 그것을 뱉었다. 피가 한 움큼 쏟아지고, 그 뒤로는 헛구역질에 가까운 기침이었다. 테이블을 붙잡고서 기침을 하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유시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현기증도 한꺼번에 몰려왔다. 유시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붙잡고 있던 다른 손을 테이블로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또 그의 몸이 테이블 위로 고꾸라졌다. 찻잔이 넘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다행인지 아닌 것인지 아까처럼 그가 요란스레 소리를 낸들 그를 찾아올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나름 안심하며, 축 늘어진 몸으로 유시스는 엎어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 안을 가득 채우던 찻물은 테이블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홍차의 향이 집안의 커피 향과 섞인다. 그것이 느껴지자 유시스는 몹시 불쾌해졌다. 아무래도 그 원인일 테이블보를 버려야 성이 차겠다 싶은 그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현기증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고, 몸에는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 안정적이지는 못한 몸을 비틀거리며 그는 테이블보를 들어냈다. 최고급 천으로 만들어졌을 테이블보 아래에 드러난 나무 테이블은 그 자체로는 대단하다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떤 의미 테이블보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유시스는 개의치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테이블보를 버리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바깥까지 터덜터덜 걸어가 그것을 버리고 돌아온 유시스는 다시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창가 앞에 있던 침대에 털썩 앉으며 유시스는 지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은 채 그는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럽다.”

 

잠이라도 자게 두어라. 라고 말하니 곧 조용해졌다. 그 뒤로 유시스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 정신없이 하루는 지나갔다. 밤이 지날 동안 또 쌓여온 일들은 아침의 유시스를 괴롭게 하였고 그걸 유시스는 또 기가 막히게 해결을 했다. 그렇게 칭송을 받은 것도 한 순간. 유시스는 다시 심연 속에 있었다. 거대하고 어두운 바다의 깊은 곳.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 속에 유시스는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 퍼뜩 눈을 떴다. 230. 평소랑 비슷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 위에 뉘인 몸을 일으킨 유시스였으나 그가 서 있는 곳은 집무실이 아닌 심연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을 하려던 유시스의 앞에 심연 속에 푸른빛이 도는 흑발을 지닌 소년이 보였다. 유시스는 그 얼굴을 보며 퍼뜩 놀랐다. 이것은 어찌 보면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달랐다. 어제 나온 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였으나 오늘 나온 이는 유시스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린 슈바르처. 유시스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였다. 그에게 가장 큰 변화를 주었던, 그리고 그에게 가장 소중하였던 순간의 중심에 있던 이. 과거의 편린 그 자체.

 

이번엔 너인가, .”

 

유시스는 지친 듯 말하였다. 소년, 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그렇게 말하더니 린은 유시스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튼 가자.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

 

애들이라. 그러고 보니 린의 모습은 지금의 유시스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상당히 어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린의 모습은 유시스가 린을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너무도 달라진 길이라 이제는 돌아갈 수 없을, 사관학교 시절의.

 

. 어서.”

 

유시스는 그의 손에 이끌려서 갔다. 주변의 세상은 어느 새 바뀌어, 노르드 고원을 떠오르게 하는 거대한 평원이 되어 있었다. 가슴을 확 뚫는 듯한 공기의 감각이 마치 꿈이 아닌 듯 생생했다. 이것이 정말로 꿈인가? 현실과도 유사한 감각 속에서도 유시스는 린의 어린 얼굴을 보고서 이것이 꿈임을 자각하였다. 자신도, 지금의 린도 저렇게 앳된 시절은 예전에 이미 흘려 보낸 상태인 것이다.

 

어디에 가는 거냐. .”

 

유시스는 물었지만 린은 대답 대신 가자. 라는 말만 더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끌리다 린이 발을 턱 멈춤과 동시에 그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 다 왔어.”

 

그곳에는 그리운 이들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엔 너무나도 달랐지만 함께임이 당연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갈라진 길 너머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던, 그리운 이들. . 엘리엇. 유시스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렀다. 가이우스. 알리사. 라우라. . 엠마. 밀리엄. 그 자리에 끝내 함께할 수 없었던 이를 제외한 이름은 모두 불렀지만 유시스는 끝내 한 사람의 이름만큼은 떠올리지 못하였다.

 

어라. 왜 전부 부르지 않는 거야?”

 

린이 물었다. 유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내려오는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모두가 모였잖아. 유시스는 기쁘지 않아?”

아니. 물론 기쁜 일이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지 않은가. 유시스는 그 말을 내뱉으려다 도로 담았다. 묘한 것은, 유시스는 빠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하였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감각만 알고 있을 뿐인 것이다. 린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유시스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잡고 있던 유시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제법 주름이 진 손이 말끔한 손에서 떨어진다.

 

다행이야. 유시스.”

 

린은 말하였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그의 뒤에서 웃고 있었다.

 

뭐가 말이냐.”

네가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

 

무엇을 기억한단 말이냐. 유시스는 그걸 물으려 하였으나 그 순간 평원은 사라졌다. 다시 그는 집무실에 돌아와 있었다. 넓고 화려하지만 황량한 그 곳에.

 

어서 와. 유시스. 또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돌아왔다. 유시스는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웃었다.

 

린을 만나고 왔다.”

 

유시스는 목소리에게 말하였다. 그가 듣든 듣지 않든 상관없었다.

 

“VII반의 동료들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으로 말이지.”

 

그래? 목소리가 대답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네가 없었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다.”

 

유시스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의 비쩍 마른 손 끝이 흔들렸다.

 

네가 없는 꿈은 의미가 없다.”

 

목소리의 형체가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유시스는 잠시 보였던 그 형체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아주 조금 위로 올렸다. 이제야 분명히 보였다. 심연에 빠져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히 제 옆에 있었던 이. 원래 이 집무실을 사용했어야 할 주인. 그리고 유시스가 머무는 집의 진짜 주인.

 

……레그니츠(Regnitz).”

 

알아채는 게 늦다고. 목소리의 주인은 툴툴대며 웃었다.

 

 

 

 

 

**

 

유시스가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목소리밖에 존재하지 않던 이는 어느새 그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정말로 실존하는 것 같은 허상으로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특별히 유시스에게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유시스가 일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거나, 제도의 거리를 바라보는 정도 말고 그가 하는 것은 없었다. 유시스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의외로 신경이 쓰이는지라, 유시스가 일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 그는 깜짝 놀라다가도 일이나 하지 그래?’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 반응이 진짜 같아서 놀라다가도, 유시스는 그의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보다 훨씬 젊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다. 아까 보았던 린과 비슷하다. 그는 현실이 아니었다. 지금 유시스가 서 있는 곳은 현실과 심연의 경계. 이를테면 백일몽(白日夢)이다. 깨어 있지만 깨어 있지 않은 상태와도 같았다.

 

- 그렇게 내가 신경이 쓰여?

 

그는 물었다.

 

당연하다. 옆에서 그리 요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면 누가 모르겠나.”

 

유시스는 대답했다.

 

- 내가 뭐 얼마나 요란스럽게 움직였다고?

 

그가 반박하였다.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는 움직였다.”

 

그 말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못 당하겠다니까. 그 말을 더하며 그는 소파 위에 덜컥 누웠다. 학생 시절의 그의 몸은 소파 크기에 딱 맞게 누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 . 이러면 괜찮겠냐?

 

유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펜을 들어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그는 그 소파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유시스 역시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일은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유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520.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이다.

 

또 목 아래에서 거대한 덩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큰 기침소리와 함께 핏덩이가 뱉어져 나왔다. 유시스는 제 손에 묻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유시스는 시선을 돌려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그 쪽은 미동이 없었다. 가만히 보니 그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라는 건가? 유시스는 손에 묻은 핏덩이를 닦아냈다. 거짓말처럼 그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꿈의 사람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의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유시스가 아니었다. ‘그 날이후로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지겨울 정도로 가슴에 박아둔 상태이다. 이제 와서 외면할레야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시스는 피를 닦아낸 천을 버리고, 책상 옆에 있던 책장 서랍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 그는 종이 하나를 꺼냈다. 펜으로 휘갈긴 글씨는 유시스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것이었다. 소신의 목숨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부디 저의 후임은 유시스 알바레아 경에게 맡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키아스 레그니츠.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 편지의 내용 역시 유시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것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날 이후의 유시스는 이것에 사로잡혀 살아왔으니까.

 

마키아스 레그니츠. 죽기 직전의 그는 젊은 황제의 위세를 뒤에 업고 재상이 된 이였다, 당시의 신 혁신파의 대표로, 그 역할에 맞게 그가 내놓는 정책도 모두 구 제도를 겨냥하는 정책이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아군만큼이나 적이 많았다. 그 반대파는 대체로 구 제도의 수호 안에 있는 사람들로 제국의 귀족들이 그 대표 격 존재였다. 그들은 마키아스를 필두로 이루어진 신 혁신파에 대항하여, 신 귀족파라는 이름의 일파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일파의 수장 격 존재로서 유시스 알바레아를 내세웠다. 그런 만큼 당시의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반대파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유시스에게 그는 오래된 악우(惡友)였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관학교의 추억을 공유하는 동료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그 시절의 인물. 유시스에게 있어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유시스가 마키아스와 만나는 일은 잦았다. 표면적으로는 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들이 만남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운명의 날의 하루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지 마라.”

 

유시스는 그 날도 마키아스에게 말했다. 광장의 그 연설은 유시스가 판단하기에 위험한 일이었다. 마키아스에게 적이 많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오. 드라이켈스 광장. 그것이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사건은 유시스에게나 마키아스에게나 너무도 괴로운 기억이었다. 내전의 시작 역시 그 때에 있었던 하나의 총성이었다. 정오, 드라이켈스 광장에서 이루어진 재상의 연설. 보통은 그런 감을 믿지 않는 유시스였지만 유독 그 때만큼은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아니. 갈 거다.”

 

그럼에도 마키아스는 가겠다고 하였.

 

어째서냐.”

 

유시스는 물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어. 나도 그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걸 극복해야 제국의 미래도 있는 것 아니겠냐. 언제까지고 거기에 사로잡힐 수는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시스는 더 이상 마키아스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대로 운명의 날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 날은 마키아스도 상황도 모두 달랐다. 그것이 몹시 불안했던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곁을 지키기로 하였다. 반대파의 대표 격 존재인 자신이 그의 곁에 있다면, 함부로 그를 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걱정 마. 별 일 없을 테니까.”

 

의장을 갖추는 마키아스의 뒤쪽에 선 유시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마키아스는 말했다.

 

나는 너를 걱정해서 온 것이 아니다. 한심하게 실수나 하지 않도록 지켜보러 온 것이지.”

 

유시스는 말하였다. 그 말에 마키아스는 핏 웃었다.

 

그렇지. 그래야 너지. 안심했어.”

 

안심했다는 말조차 유시스에게는 낯설었다. 평소에 너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묻고 싶었으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던 그의 어깨를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역시 조금은 두려웠던 것일까. 하지만 유시스에게 그 답을 알려줄 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정오. 마키아스가 연설의 첫 마디를 시작하였다. 그 때 총성이 울렸다. 유시스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키아스에게 달려갔다. 그는 마키아스를 밀쳐낼 생각이었다. 그 때와 똑같이 만들 수는 없었다.

 

안 돼.”

 

하지만 마키아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마키아스는 저를 밀치려는 유시스를 도로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주변 사람들의 술렁이는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의사를 불러! 근위병들의 웅성거림 사이를 지나 유시스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갔다.

 

레그니츠!”

 

마키아스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마키아스에게 밀려 넘어진 유시스는 허겁지겁 그에게로 다가갔다. 레그니츠. 한 번 더 그를 부르자, 마키아스는 피를 흘리며 쓸쓸히 웃었다.

 

왜냐, !”

 

유시스가 그를 흔들었다. 흔들지 마. 머리가 울린다고. 마키아스는 힘겹게 말했다. 왜 나를 밀쳤나, 레그니츠. 조용히 물었다. 마키아스는 대답 대신 웃었다.

 

유시스.”

 

마키아스가 그를 불렀다. 유시스는 그에게 다가갔다. 죽음 직전일 마키아스의 눈가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그가 이제 곧 눈을 뜨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가지 마. 저도 모르게 말했다. 마키아스는 유시스의 떨리는 손을 붙잡고는 난처한 듯 웃었다.

 

책상 왼쪽 첫 번째 서랍.”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유시스의 손을 맞잡은 마키아스의 손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빛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점차 사라지고, 마키아스는 그의 이름을 지닌 시체로 변모하였다. 유시스는 그 과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따라 서랍에서 발견하였던 것이 바로 그 편지였다. 자신이 죽으면 유시스에게 자신의 자리를 달라던 문장이 쓰인. 유시스는 웃음이 나왔다. 이 편지를 언제 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키아스는 제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유시스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구조를 모두 짜놓고 있었다. 우습기 짝이 없다. 그는 이미 제가 없는 세상까지도 그려 놓고 있었다. 왜 유시스를 위기 시 저의 후임으로 정했는가. 유시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키아스는 자신의 급진적인 형태로 인하여 적을 많이 만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 급진적인 모양이 불만으로 나타난 셈인 것인 셈이다. 그러니 반대격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유시스를 최고 자리에 둠으로써 반대파의 회유를 꾀하려 함이다. 또한 유시스는 분명 제국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발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유시스의 눈에는 또렷이 보였다. 그래서 그것이 화가 났다.

 

레그니츠 재상을 쏜 이들은 곧 붙잡혔다. 제국의 구 제도를 지키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일파였다. 죽은 마키아스의 유지로 재상이 된 유시스는 그들에게 처형이라는 이름의 철퇴를 내려주었다. 애초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과격하게 나서는 이들은 유시스를 필두로 한 귀족파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줄 리 없었고, 또한 그 목적이 과거에 머물기 위함이라면 살려야 할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떨어진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워 과거에 멈추려는 멍청한 자들. 저가 없는 미래까지 생각했던 마키아스가 그런 이들의 총탄에 죽었다는 것이 유시스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처분은 몹시 빨랐으며, 또한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알바레아 경.”

 

그런 그의 감상을 깨는 목소리는 집무실 바깥에 있던 근위병이었다. 무슨 일인가. 유시스는 대답하였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실 시간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6시에 황제를 알현하기로 한 날이었다. 유시스는 그것을 잊고 있던 자신을 잠시 질책하며, 황제를 알현할 준비를 한다. 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정기적인 보고의 시간이었다. 마키아스를 재상으로 삼았던, 그리고 마키아스의 유지대로 유시스를 재상으로 삼았던 젊은 황제는 상당히 국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판단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유시스를 재상으로 올려달라는 마키아스의 부탁을 완벽하게 이해하였던 이 중 한 명이었으니. 유시스가 일을 무던히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역할도 굉장히 컸다 할 수 있다.

 

곧 가겠다.”

 

채비를 마친 유시스는 근위병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금방 문을 열고 근위병의 호위를 따라 황제가 있을 알현실로 향하였다. 발프레임 궁 안에서도 가장 거대할 그 곳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화려한 왕관을 쓴, 금발의 남자가 거대한 테이블에 앉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알바레아 경.”

유시스 알바레아. 황제 폐하를 알현합니다.”

 

유시스가 예의를 갖춰 그에게 인사하였다. 황제는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황제의 웃음을 가만히 응시하며 유시스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것이오?”

 

유시스가 의자에 앉자마자 황제는 물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송구할 따름입니다.”

 

유시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시스는 그 화제에서 이야기를 돌리고 싶었다. 불편하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소재이다.

 

그럼. 국정 보고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본론을 바로 꺼내들었다.

 

좋소.”

 

황제는 그것을 승낙하였다. 유시스는 저가 갖춘 자료들을 펼쳐 황제 앞에 내놓았다.

 

최근 제국의 군비 현황입니다. 기갑병 등에 들이는 군비가 생각보다 많이 소모된 모양입니다.”

그 현황에 대해 군부는 뭐라 하더이까?”

조사 중이라고만 말하더군요.”

정보국에서 파악된 바는 있소?”

아무래도 중간에 한 번 군비가 빼돌려진 루트가 발견된 모양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폐하.”

 

말을 이어가는 유시스에게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이것은 여태 그가 느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유시스가 이마를 손으로 감싸려고 하였던 그 때 갑자기 그의 몸에 힘이 풀린다. 유시스의 몸이 무너졌다. 입에서는 피를 쏟으며 그는 힘없이 테이블 위로 고꾸라지고, 이윽고는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알바레아 경! 황제가 외치는 소리를 끝으로 곧 유시스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서 의사를!”

 

쓰러진 그를 보며 황제가 외쳤다. 그를 따르던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 속에서도 유시스는 결국 눈을 뜨지 못하였다. 입가에 흐르는 피가 곧 다가올 그의 상실을 알리고 있었다.

 

 

 

 

 

 

*

 

어서 와, 유시스.”

 

그를 부르는 소리에 유시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청록빛 머리카락에 안경. 마키아스였다. 그는 학생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시스는 이것이 또 꿈이라 생각하였다.

 

꿈이야.”

 

마키아스가 유시스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말하였다.

 

아니라고 말할 법도 한데.”

 

유시스가 피식 웃으며 말하였다.

 

꿈이다. 현실의 나는 이미 죽었고, 학생 시절은 이미 지나갔잖아.”

레그니츠.”

 

학생의 모습임에도 마키아스는 죽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제 입으로 죽었다라고 말하는 마키아스는 지나간 과거의 모습임에도 몹시 덤덤했다. 그 말에 왠지 유시스는 안에서 울컥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알아. 너에게 짐을 떠맡겼다는 것 정도는. 그리고 네가 그걸 기꺼이 받을 인간인 것도 알지.”

 

마키아스의 눈망울은 촉촉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유시스는 난처해졌다. 오랜만에 만남이다. 불만이라도 토로할 생각이었건만 어째서 네가 그런 얼굴을 하는 건가. .

 

그러고 보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네.”

필요 없다. 그딴 건.”

 

네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단 말이다. 라는 말을 유시스는 삼켜냈다. 마키아스는 쓸쓸히 웃었다.

 

미안. 역시 너무 무거웠나.”

필요 없다고 했다.”

 

유시스는 왈칵 짜증을 담았다. 마키아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유시스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마키아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네 놈이 내게 떠맡긴 것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마키아스에게 유시스는 말하였다. 눈빛에 불쾌한 기미를 굳이 없애지 않고서.

 

그러니 나는 너에게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다.”

 

유시스의 말을 들으려 고개를 든 마키아스의 얼굴이 엉망이다. 뭘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새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모든 감정이 거짓 없이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특히나. 물론 나이를 먹을수록 어느 정도 감추는 법을 알게 된 그였지만, 유시스 앞에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랬다. 그리고 지금 마키아스가 어떤 기분인가 하면 당장이라도 그를 안고 울어줄 것만 같다. 그것을 보니 유시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네가 내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사과 따위를 하는 걸 보니 분명 여기는 꿈이 맞는 모양이군.”

네 놈은 꼭.”

 

마키아스가 왈칵 성을 내자, 유시스는 겨우 안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죽을 때에도 사과 한 번 안 하던 놈이.”

…….”

 

마키아스는 대꾸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이 아주 조금 재미있다 생각하면서도 유시스는 곧 생각을 고쳤다. 과거의 모습이 너무도 반가워 저도 모르게 감상적이 된 모양이다. 아니, 감상적이기 보다 그리운 과거의 내음을 맡은 느낌 쪽에 더 가까울까.

 

그건……. 미안하다.”

사과를 받으려 한 것이 아니다.”

 

유시스는 답답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네게 받아달라고 사과하는 게 아니야.”

 

마키아스는 유시스가 했던 것과 똑같이 되받아쳤다. 유시스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래야지.

 

그저 내가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때 못했으니까.”

…….”

 

마키아스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유시스는 의문이 들었다. 이게 정말로 꿈인 것인가? 유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정말로 그와 대화하는 것만 같다. 그야말로 이전의 꿈과 같다. 현실과 심연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그러다 유시스는 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분명히 그는 전까지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무 보고를 하는 와중에 기억이 끊어졌다. 그러고보니 신기하게도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설마하니.

 

마중이라도 온 건가.”

 

유시스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마키아스는 몹시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한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마중이라니.”

아닌가? 이 타이밍에 나타나기에 나는 네가 나를 데리러 오는 줄 알고 있었다만.”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을 굴리던 마키아스가 말했다.

 

아니. 데리러 온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군. 내가 지금 네 눈에 보인다는 얘기이니.”

보이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쭉 네 곁에 있었어.”

곁에 있었다고?”

 

유시스가 놀라 되물었다.

 

그래. 그러니 새삼스레 데리러온다 어쩐다 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마키아스가 씁쓰레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말한다. 그는 이렇게 된 상황 자체가 썩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너도 넌지시 느끼고 있었던 것 아니야?”

…….”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유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마키아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키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 너는 전부 알고 있었구나.”

 

그러더니 마키아스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꺼냈다. 유시스는 그의 생각의 회로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죽고 나더니 말하는 법도 잊었나?”

바보냐. 너랑 말하는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 와중에도 유시스의 말에는 귀신같이 반응하는 마키아스였.

 

멍청한 놈.”

언변이 모자라니 이제는 다짜고짜 욕이냐.”

멍청한 놈한테 제대로 말해줬을 뿐이다. 너는 무섭지도 않아? 너는 이제 곧 죽는단 말이야!”

 

마키아스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확 뻗어 유시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

멍청한 놈. 살려면 끝까지 살 것이지 왜.”

 

마키아스의 목소리가 유시스의 귓가에 사무친다.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려 한다. 핏덩이 같은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진득하고 무거운 것이다.

 

무섭지도 않아? 너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거야. 죽는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걱정은 잔뜩 해주고 있다. 이전부터 유시스는 그런 그의 호의가 좋으면서도 우스웠다. 아닌 척 하면서 얼굴에 티는 다 나고. 숨길 줄은 모르면서 드러내면 도망친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지가 쓰인 편지를 보았을 때 유시스는 몹시 놀랐더랬다. 어느새 그는 유시스가 모르던 이가 되어 있었다. 함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미 저 멀리까지 나아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어디까지나 예전의 그 모습이었다. 결국 유지를 본 순간 유시스는 저와 마키아스의 거리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걸을 길이 다를 것임은 이미 이전부터 서로가 인지하던 것이었다. 유시스가 반쯤은 억지로 떠맡겨졌던 귀족파의 수장 역할을 받아들인 것도 그가 아니었다면 마키아스를 막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키아스 역시 유시스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유시스는 그와 자신이 어찌 되었든 맞는 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본 순간 알았다. 결정적으로 그와 자신은 달랐다. 유시스가 방황하다 앞으로 어렵사리 나아가는 타입이라면, 마키아스는 이미 저 멀리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타입이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유시스는 이미 그것을 느낄 대로 느꼈다. 그래서 더욱 그의 죽음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미 저 먼 미래를 바라보는 이가 고작 어리석은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라는 이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하지만 마키아스는 그 미래를 유시스에게 맡겼다.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살아왔다. 떠맡은 짐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유시스는 저에게 맡겨진 의무를 당연시했다. 그 의무야말로 그를 살게 해주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없었다면 저는 진즉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키아스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굳이 유시스 알바레아에게 제 자리를 남겨준 것이다. 유시스는 그것이 조금 불쾌하였다. 마치 자신이 그 레그니츠에게 모든 것을 읽혀버린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휘둘릴 줄만 알았던 그 레그니츠에게.

 

두렵지 않다.”

 

동정심을 잔뜩 담은 눈동자를 저를 바라보는 마키아스에게 유시스는 말했다. 그랬다. 그는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날 모두 사라졌다.”

 

마키아스의 동공이 커졌다.

 

오히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

 

유시스는 아주 살짝 웃었다. 마키아스는 결국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만다.

 

멍청한 놈.”

그 말이 두 번째다.”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다. 멍청한 놈.”

 

그 말 속에 담긴 것은 일종의 체념이었다.

 

네 놈이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일부러 그것까지 남겼건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였군.”

 

마키아스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살기를 바랐어.”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 유시스는 제 어깨에서 툭 떨어지는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죽지 않았으면 했다. 더 오래 살았으면 했어. 네가 더 오랫동안 나를 보지 못했으면 했단 말이다.”

…….”

병이라니. 그것도 몸을 험하게 굴려서 생긴 거잖아. 왜 그랬던 거야. 제국의 밝은 미래를 보고 싶지 않았어?”

레그니츠.”

 

마키아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나에게 미래라는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런 걸 보는 건 너 같은 녀석이나 하는 것이지.”

 

유시스의 눈매가 조금 쳐졌다. 그 눈이 상당히 처연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죽는 게 나였으면 했다.”

유시스…….”

어째서냐. 왜 나를 막았던 거냐.”

 

마키아스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유시스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유시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답해라. 마키아스.”

 

마키아스. 그 울림에 그는 움찔했다. 그러다 그는 난처한 듯 웃었다.

 

말했잖아. 네가 살기를 바랐다고. 그 뿐이야.”

 

그러다 마키아스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쪽에는 시계가 보였다. 집무실에 있던 바로 그 시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정일지 정오일지 전혀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시간이 다 됐네.”

 

마키아스의 웃음이 슬퍼 보였다. 그는 정말로 이 순간을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유시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가장 기다리던 그 순간이 도래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안개 속에서, 깨지 않는 백일몽 속을 헤맬 필요가 전혀 없었다.

 

가자. 유시스.”

 

말과는 달리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마키아스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시스는 그 손을 잡았다. 그가 뻗은 손은 잔주름이 난 손과는 달랐다. 사관학교 학생 시절. 검을 잡던 그 손이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지던 짐을 모두 놓은 것처럼 그렇게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몸은 가볍고 기분은 좋았다. 유시스는 마침내 무언가 해방된 느낌이 들었다. 마키아스의 손에 이끌려 몸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이제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영원히 이 꿈에서 깨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현실과 심연의 경계 사이에서 이제 그는 완벽하게 심연에 몸을 맡기었다.

 

낮의 새하얀 꿈은 끝이 났고, 이제 기나긴 밤이 찾아왔다.

 

 

Gute Nacht.

 

 

 

 

 

 

 

-

 

알바레아 경!”

 

황제와의 알현실에서 쓰러져 피를 토하던 이후, 급격하게 황실 접대용 침대로 옮겨진 유시스 알바레아가 명을 달리 하는 순간, 마치 모든 것이 끝난 듯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유시스의 얼굴 속에서는 고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호상(好喪)이라면 호상일까. 하지만 그를 잃은 이들의 충격을 생각하면 호상과는 분명 거리가 멀 것이다. 마키아스 레그니츠에 이어 또 하나의 유능한 재상을 잃은 황제의 통곡 소리를 시작으로 사람들의 애통한 소리가 발프레임 궁을 포함한 제도를 가득 메웠다. 그의 병이 지닌 원인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재상이 된 이후 과도하게 일을 한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의 장례는 성대히 진행되었다. 식장에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로 문전성대를 이뤘다. 그 조문객들 사이에는 그와 과거를 함께 하였던 이들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는 영원히 다시 모일 수 없을 과거의 편린을 찾아 온 VII반의 이들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안경을 쓴 여성의 말을 시작으로 각기 제 감상을 한 마디씩 뱉어내었다.

 

마치 따라간 것 같아.”

 

은발의 작은 여성이 말하였다.

 

두 달 전에 유시스를 봤을 때 병이 있는 기미는 하나도 안 보였는데.”

 

적발의 남성이 말하였다.

 

어쩌면 마음의 병이었을 지도 모른다. 눈치를 챘어야 하는 것을.”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하지만 유시스. 그런 티를 내는 애도 아니고.”

 

금발의 여성이 말하였다.

 

눈치를 챘더라도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재상 자리 자체가 그에게는 짐이었을 지도 모르지.”

 

갈색 머리의 키가 큰 남성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말한들, 유시스는 돌아오지 못하겠지. 마키아스처럼.”

 

푸른빛이 도는 흑발의 남성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떼었다. 모두들 그의 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버리지 못한 습관.

 

이렇게 떠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했는데. 왜 그러지 못했던 걸까.”

 

남성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그 말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남자, 린 슈바르처는 멀찍이 쌓여 있는 새하얀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렇게나 꽃이 많은데. 하지만 린은 유시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미 그 때부터 그는 망가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무력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린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몸부림치는 유시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키아스의 죽음은 VII반의 이들에게도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더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시스가 받았을 충격과, 그 이후로 느꼈을 무력감에 대해서 린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과거에 겪었던 경험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린은 그 무력감을 극복한 이였다. 그는 제가 어떤 식으로 그 무력감과 괴로움을 극복했는지를 떠올렸다. 결국 그를 일어서게 한 것은 모든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이미 멀어진 사람이 아닌 자신을 소중히 여기던, 그리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모든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린은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 너에게 바쳐진 꽃들을. 그리고 너를 찾아온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네 죽음을 슬퍼해주고 있어. 너는 아직 살 수 있었어. 조금 더 살 수 있었단 말이야.

 

린은 조화 더미 위에 제가 들고 있던 조화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여 묵념하였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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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났습니다. 지금 이 시각 새벽 325.

저는 지금 무사히 마감을 쳤습니다. 신이 납니다.

 

마치 저더러 파라고 떠먹여주는 듯한 마키아스의 얼굴과 성격을 보고

섬궤를 하기 시작했던 것도 어언 2개월.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브라보!

 

하지만 저는 지금도 섬궤 2 엔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몹시 고통받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완벽한 미래날조입니다.

 

첫 책부터 살벌하게 막 죽이는 책이라 죄송합니다.

마키아스가 죽고 말라가는 유시스를 쓰고 싶었습니다.

제 안의 유시스는 마키아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이이기 때문에.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 무의식의 뭔가를 쓰고 싶었으나

정작 제 마감이 무의식이네요.

 

아무쪼록 구매하신 분들께는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행사에서 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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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14.11.23.

SEN NO KISEKI Farody Book

Jusis + Machias

Written By KASA

 

 

파본 시 당일 행사장에서 신기합일을 쓰시면 교환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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